새로운 끝, 혹은 오래된 시작(9)

 

냉장고가 머리맡에서 빛나고 있었다. 예리한 메스로 가슴을 열어 놓은 듯 펼쳐진 문안의 불빛이 하도 밝아서 이상했다. 친구 집의 냉장고가 작은 년이 아닌 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안이 이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곳이기라도 하듯 친구는 그 안에 엉클어져 않아 있었다. 좀 춥지 않을까. 냉장고에서 나오는 냉기가 그녀에게까지 쳐들어오고 있었다. 음식을 씹는 소리가 냉기에 실려오고 있었다. 왠지 그 소리가 너무 짜서 그녀는 자신이 일어나 있다는 기척을 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슬쩍 얼굴을 들어 친구 쪽을 쳐다보았다. 친구의 옆얼굴이 1/3쯤 불빛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친구의 얼굴에는 마치 뱀이 엉겨 지나간 자리 마냥 수십 개의 주름들이 어둡게 잡혀 있었다. 뱀은 눈꼬리에서 시작해 볼을 타고 내려와 입가에서 서로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뱀들 위에 미끄럼이라도 타듯 물방울들이 놀고 있었다. 친구의 이빨에 장단을 맞추어 뱀들이 꿈틀거릴 때마다 눈물들은 미끄럼을 탔다. 초코파이 하나에 뱀들이 여섯 번 기지개를 켰고, 세 개의 눈물방울이 미끄럼을 타고 내려와 친구의 허벅지에 부서졌다. 쵸코 틴틴 하나엔 두 번, 한 번, 쵸코 하임 하나엔 네 번, 두 번, 그녀가 그 조합들의 수를 세는 동안에도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파리와 같은 수만, 수백 만개의 눈을 가진 전자 렌지가 친구의 눈물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많은 다른 '원룸'아파트 주인들은 자신의 집을 가리켜 마루가 전부인 집이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친구의 집은 남들은 마루라 우기고 싶어할 지 모르는 그 공간이 전부 부엌인 집이었다. TV, 쇼파, 책장 같은 것들 대신, 전자 렌지, 밥통, 냉장고, 제빵기, 요구르트발효기, 간편 통나물 시루, 녹즙기, 약탕기, 등등이 집을 지배하고 있었다. 친구는 돈만 생기면 언제나 그런 기기들을 사댔다. 그러나 콩나물 시루 안에서는 콩나물대신 거미줄만이 자라고 있었고, 그런 상황들은 다른 기기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친구의 주방 기기 구매 벽도 결국 친구가 불어터진 오뎅이 된 이후에는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TV에서 새로 나온 김장독이 어여쁜 또도독 소리를 내어도 친구는 더 이상 눈을 반짝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장독 하나가 없다고 해도 친구의 거실은 곧 주방의 연장이었고, 그녀의 주방은 거실의 연장이었으며, 다용도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친구의 집에 있는 수많은 주방 기기들을 무시라도 하듯, 친구가 먹고있는 것들이란 온통 과자류, 쵸콜렛류였고 그녀는 이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상황을 직접 보고 있으려니 왜 자신이 친구의 집에서 오랜 시간 머물기를 꺼려왔었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어두운 가운데 냉장고 빛을 중심으로 해서 여기저기서 제 자신의 존재를 밝히려는 듯 빨간 전원 불빛들이 빛나고 있었다. 써먹지도 못해먹는 주방 기기들이었지만 멀티 탭으로 모두 전원만은 항시 꽂아두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그녀 엄마의 부엌에서 항상 잘 닦여서 번들거리던 은식기들 같아 보였다. 어둠 속에서 맹수의 눈들이 저렇게 빛날까 하고 어린 시절의 그녀를 놀라게 하던, 엄마의 손기름일것만 같던 번뜩임들,,, 끈적거리는 귀두와도 같이 윤이 나도록 닦여있는 식기들은 무엇보다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이 전자였는지 후자였는지 그녀도 잘 몰랐다. 서로를 연상시키는 서로가 아마도 다 싫었을 것이다. 도시락 전문점의 플라스틱 용기가 아무리 많은 환경호르몬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그녀는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친구는 이제 먹는 것을 그만두고 냉장고안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런 친구와 냉장고는 대화를 나누는 연인사이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 너도 먹을래?"
갑자기 정적을 부수고 냉기에 실려온 그 소리는 마치 집안의 모든 주방 기기들과 냉장고가 합심하여 낸 소리 같아서 그녀는 엉겁결에 "응."이라는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밀가루는 한 번 배속에 담아 보지도 못하는 제빵기가, 약 비슷한 것도 끓여본 적 없는 약탕기가, 무즙 한 번 내본 적 없는 녹즙기가, 계란 한 번 발효시켜 본 적 없는 야쿠르트 발효기가 그리고 정작 냉장해야할 음식은 한 번도 담아보지 못한 냉장고와 김치 한 번 못 담을 게 분명한 아직은 여기 없는 김칫독까지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 이리와 앉어."
친구가 늘어놓은 과자들 중에는 "쵸코"자가 붙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무슨 달콤함이 그리 부족해서 이렇게도 많은 쵸코~~를 먹어서 채우려고 하는 거길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쵸코~~광고에는 여자들만이 나오는 지도 광고주들이나 알 일이었다.
" '왜' 자가 들어가는 질문은 하지마." 친구가 뱀들을 조련시키듯 말했다.
" 쵸코렛들은 왜 이렇게 버석거리는 포장지로만 싸는 지 몰라. 미친년들 졸라 안 뜯어지네."
친구가 이어서 툴툴거렸다.
" 밤에 일어나면, 어떤 줄 아냐, 모든 불빛들이 날 비웃어, 안 먹고는 못 배길 걸하고, 화장실거울이 이 집 부엌하고 짜고 날 살찌우려는 거 같어. 먹는 건 난데 그게 그게 아니다. 길거리에 나서면 사람들 시선이 또 우리 집 부엌 불빛들 같어. 모든 게 얽혀서 내가 뭐가 먹고싶은 건지, 안 먹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제빵기를 사면, 내가 스스로 해먹는 거니까 음모라는 느낌이 안 들겠지 하고 덜컥 사버리고, 콩나물 시루도, 요구르트 발효기도, 다 그렇게 샀는데. 결국 나만 속은 거지. 내 일생에 단 한번도 스스로 뭔가를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도 내가 하루종일 하고 있는 일이라곤 먹는 거란 말이야."
많은 사람들이 친구의 집에 오면 전자 렌지를 보고 TV라고 착각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의 전자 렌지는 친구의 냉장고가 으레 거실 책장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바로 다른 여느 집들의 TV가 있어야 할 곳에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보통 TV는 어느 집이든 거실의 주인이 아니었던가. 모든 쇼파, 책장, 전등 등을 비롯한 가구들은 항상 TV를 축으로 해서 배치되어있으니까. 친구의 전자 렌지도 마루의 가장 목 좋은 곳에 버티고 있다. 친구는 그 안에 온갖 종류의 전자 렌지 식품들을 넣고 하루종일 돌리며 노란 불빛의 회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게 친구의 일과의 전부였다.
" 12월 31일에는 뭐 할거니?"
" 새로운 천년을 아무 생각 없이 맞기 위해 수면제 몇 알 먹고 초저녁부터 잘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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