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끝, 혹은 오래된 시작(5)

 

그녀는 그날 꿈을 꾸었다. 어렸을 때부터 꾸어온 공상 영화같은 꿈이 나오는 평상시의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검은 각설탕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희미하게 집안 여기 저기의 윤곽들이 눈에 들어올 즈음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잠이 깨면, 항상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모든 물체들의 정체를 파악하고서야 다시 잠이 드는 습관이 있었다. 아 저건 내가 벽에 걸어놓은 흰 셔츠로군, 저건 책상이고, 저건 책상 위에 있는 시계, 모자... 그녀는 그 날도 현관부터 시작해서 점검을 했다. 저건 신문꽂이, 그 위에 있는 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광고지들, 우산꽂이...현실보다도 꿈 속이 더 좋다고, 꿈만 꾸면서 살고 싶다고 종종 말하던 그녀는, 그러나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아직 몰랐다. 그녀의 시선이 부엌 싱크대에 이르렀을 때 화장대 쪽의 윤곽이 잠깐 흔들렸다 멎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엇, 하는 반응을 보이려는 찰나에 온 집안의 구석구석에서 작고 검은 물체들이 천장으로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아주 작을 실밥모양을 하고 있었고, 까만 교복을 입은 초등학교 아이들 마냥 운동장 같은 천장을 맴돌며 정렬이라도 하는 듯 했다. 그것이 허공에서 주먹만한 작은 공모양으로 뭉쳐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그 실밥 같은 것들이 자신이 아침마다 쳐내던 눈썹 조각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푹신푹신한 실타래 마냥 동그랗게 뭉쳐진 눈썹조각들은 한 참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설령 그것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걸 손으로 잡아 보겠다 거나 하는 등의 일은 하지 못했을 터였다. "저게 뭐야?" 갑자기 한 친구의 생각이 났다. 그 친구는 자기 주변의 모든 사물들을 미친년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삐삐도 미친년, 필통도 미친년, 심지어는 가방에 달린 작은 인형까지도 친구에게는 미친년이라는 단 하나의 호칭으로 통했다. 길을 걷다가 필통이나 지갑 등을 떨어뜨리거나 하면 친구는 항상 그녀에게 "야 미친년 좀 집어 줘."하고 말했었다. 갑자기 왜 그 친구의 생각이 났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알 것 같았다. 앞으로, 허공에 공모양으로 떠 있는 저 씨꺼먼 미친년이 항상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미친년은 허공에서 둥실거리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순간 소용돌이라도 치듯 바람을 내며 그녀에게로 돌진해 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다리 사이로. 그녀는 자신이 중학교 때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던 한 하이틴 문고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항상 남자는 여자를 꼬시고 그러면 여자는 처음에는 싫어하다가 한 번의 위기를 맞고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로 되어있는 로맨스 소설들 말이다. 그 소설들의 섹스신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지만, 단 한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여자는 돌진해 오는 남자의 성기를 아주 '힘껏'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당연히 이어져 나오는 여자가 어디서 어떻게 쾌감을 느꼈고, 어떤 신음 소리를 내었고, 하는 것들...그녀는 그 힘껏 받아들인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를 알지 못했었다. 받아들인다고 하는 수동적인 단어 앞에 힘껏 이라는 능동적 행위를 나타내는 부사가 붙을 수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마치 '나는 지갑을 열심히 도둑맞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순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미친년이 그녀의 다리사이로 돌진해 와 시야에서 없어지는 순간, 그녀는 열심히 도둑맞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았다. 그 소동이 끝나고 그녀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방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크대 옆에 걸린 전신 거울이 자신의 윤곽도 점검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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