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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자고 결심했기 때문에 지금도 때때로 떠올린다.

<내 운명은 내 손으로>라는 큰글씨가 입구에 걸려있던 여자 고등 학교의 '야간 자율 학습' 독서실.
내 운명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 독서실의 한 귀퉁이에 머물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어느 정도 들어 맞았다.

아직도 그 때의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 칸막이 사이에서 공부를 하고, 영화 잡지를 보고, '시험 끝난 뒤에 하고 싶은 일'리스트를 작성하고, 편지를 써서써서 미래의 나에게로 날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내가 두고 온 나의 일부가, 그리고 그 때 우리들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닮아 있을 지금 그 독서실의 '그녀'들-수많은 '나'들이.

조용하던 독서실의 저녁 일곱시 쉬는 시간. 갑자기 팝콘이 터지는 것처럼, 하얀 옷의 소녀들이 일제히 일어나 깔깔깔 웃고 떠들어 대곤 했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내 멍한 눈은 가끔 나 자신과 그녀들을 구분하지 못했다.
(똑같이 생긴 팝콘이야 없겠지만 그걸 일일이 구분할 사람도 없지 않을까? / 똑같이 하얀 옷을 입은 소녀들은 기분 나쁘다. 그걸 보면 그걸 입혀놓고 만족을 얻는 변태가 누구일까, 라는 생각부터 든다.)

"이번 기획 제목 설마 '청소년 문제'로 할 건 아니겠지?" 아까 딸기가 물었다.

아니지, 물론. '청소년 문제'라는 거, 일방적인 규정이잖아. 청소년 입장에서 보면 그건 '어른 문제'일지도 모르는데. 이것은 차라리 '세대 문제' 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니? 서로를 타자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나? 청소년도 아니고 어른의 입장도 아닌 중간 지대. 우리는 누구?

우리는 스스로를 '언니'라고 부를 수 있겠다. 예전에 집에 오는 길에, '집에 안 가' 울부 짖으며 부모와 실랑이 하는 여자애를 본 적이 있어. '집에 가면 뭐해!' 라는 외침이 하도 애절해서 오랫동안 돌아보았지. 난 가출 소녀는 아니었지만 '집에 가면 뭐하냐'는 걔의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어.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어린 여자애의 언니가 된다면! 그애들처럼 느낄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손을 꼭잡아주고 싶은 언니들의 입장.

'청소년 보호'라. 이것도 말이 안 될까? 너무 오만한 뉘앙스인가? <빨간 마후라> 이후 한참을 떠돌았던 말이자나. '청소년 보호법' 이라는 아주 기가 막힌 법 때문에 이미지가 많이 나쁘긴 해도, 나 자신도 <빨간 마후라>를 본 후 이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았거든. 쭉 둘러앉은 사람들의 눈 앞에 노출되어 있는 <빨간 마후라> 속의 아이들이 전혀 보호받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 때문이었어. 사실 그 애들은 아기처럼 연약하고 무구해 보였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기의 몸이 주는 기쁨, 남의 몸을 탐색하며 노는 법을 배워 나가는 것 같았거든. 아마도 그것은 자연과 자본, 그리고 절망이 가르쳐 준 것이겠지.

그렇지만, <빨간 마후라>를 다 보고 어떤 형이 '애들이 다 그렇지, 나두 그랬어, 놔두면 다 커' 라고 했을 때는 그것이 무책임하게 들렸어. 우리가 그 시기를 지냈다고 그 시기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방금 거기서 살아나온 네가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몸이라는 건가? 너는 누구의 보호도 필요없이 혼자 커왔다고 생각하나? 우리는 낮에 중요한 시대적 텍스트라도 관람하듯 <빨간 마후라>를 보고 나서, 잠바 하나로 총알을 받아내는 저녁 뉴스 속의 그 소녀에게, 내가 그랬듯이 너도 살아나오라고 한다.

청소년은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보호는 섹스와 본드, 술, 담배와 같이 상대적으로 소프트코어 한 것 이전에, 살인적인 경쟁과 무자비한 자본, 천박한 이데올로기와 같은 더 하드코어 하고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캥거루가 자기 뱃 속에 아기 캥거루를 키우는 것처럼 사회도 자기 안에서 아이들을 키운다. 절대로 다른 어떤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가 학교라고 할 수도 있겠고사회라는 게 똥통인데 아이들이 연꽃처럼 순결하게 자라나기를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개자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막 무죄하게 태어난 이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없는 '세상 밖'에서 가져오겠는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라곤 아이들 밖에 없다.) 청소년은 보호되어야 한다. 그들이 방어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여기까지 쓰고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물었다. "너, 청소년 보호할 수 있어? 그걸 위해서 니가 할 수 있는게 뭔데?" 없다, 나는 못 한다. 나는 그냥 청소년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한 문단을 쓴 것 뿐이다. 그것은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몇 년전에 대학다닐 때 '날나리가 변혁의 희망'이라는 이야기를 농반으로 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못하지만 10대 애들이 성해방을 앞당길거고 매체와의 관계를 변화시킬거고 지들끼리 자치권력을 형성할거고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체제에 저항할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걔네를 엄호해야 하고 어쩌구저쩌구. 지금 생각하면 구역질난다.

이 기획을 하기 며칠 전에는, 기획의 의의를 말해보라는 편집장에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청소년은 행동하지만, 스스로에 대해 힘있게 혹은 긍정적으로 담론화해 낼 수는 없다. 그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지지는 다른 사람들이 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작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중 하나가 되는 것, 그들을 타자화 시키지 않는 보다 직접적인 글을 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연대 아닐까?" 역시 역하다.

여기에 실린 몇 개의 글은 그냥 우리가 며칠동안 만난 아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수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아이들을 만났고 이야기를 잘 못알아들었고 오해했고 쉽게 결론내렸다. 우리가 누군가와 만나게 될 때 처음에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아참. 며칠 전에는 누군가 "달딸에서 '청소년 기획'이라니, 청소년 문제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바라본거야?"라고 묻던데,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여자 청소년' 들을 많이 만나고자 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하나의 주의깊은 시각이 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적 관점에 대한 건데, 나는 운동이라면 사람의 삶의 시기의 여러 국면에 대한 성찰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성 운동은 그런 가능성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 역시 여성적 관점에서 청소년을 바라보고 싶었다고 해도 좋겠다.

더 작고 더 희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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