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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다     

8월 19일,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의 저녁

딸기와 난다의 친구 중에는 수원 시민이 한 명 있다. 이 친구는 자기 도시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여 예전부터 난다와 딸기에게, 지금이 가장 좋을 때니까 수원성에 꼭 놀러와야 한다는 둥 뭐가 어쨌다는 둥 하며 수원에 오기를 종용해왔다.

8월 19일, 이 날은 수원 운동장에서 수원과 천안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다. 골수 축구 팬이기도 한 이 수원 시민은 한 달도 더 전에 난다와 딸기를 수원으로 초대했다. "우왕, 축구 경기 따위를 봐야 하는 거야? 수원성 옆에 앉아서 오뎅이나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청소년 기획'에 대한 회의를 한답시고 서울 모처에서 난다와 만나 반나절 동안 군것질만 한 딸기가 말했다. 그러나 난다는 운동 경기장이 좋다. 사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거대한 스펙터클이 좋다. "하지만 골수 축구 팬이자 수원 시민인 우리의 친구는 절대로 축구를 포기하지 않을거야." 정말이다. 그는 딸기와 난다가 인질극을 벌이며 축구를 안 보겠다고 협박을 한다 해도 단연코 축구를 보러 갈 인간이다.

버스 안에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 친구가 말했다. "봐, 저 사람들 모두, 축구 보러 가자나." 우리는 골수 축구팬의 이 재치에 웃어주었다. 그런데 운동장에 조금씩 다가가자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교복 입은 여중생들, 슬리퍼 끌고 나온 반바지 아줌마, 기지 바지 아저씨, 밤톨 머리 사내아이들, 모두 다 앞 사람의 뒤통수를 보면서 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던 거다. "흥분되지 않니? 난 피가 빨리 도는 거 같애..." 난다는 딸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딸기는 심드렁한 눈으로 난다를 보더니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기 위해 손을 뿌리쳤다.

수원 운동장의 좌석은 절반하고 약간 더 차 있었다. 즉, 수원 쪽 좌석의 전부와 천안 쪽 약간. 아아, 이 많은 청소년들.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청소년을 한꺼번에 보게 되다니." 난다의 말에 딸기가 모처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생각보다 여학생이 많네." 관중들 가운데 많은 수가 고딩이거나 중딩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응원을 위해 모여앉아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우리는 각자 자기가 원하는 걸 보게 되었다. 축구 팬 수원시민에게는 축구 경기, 난다에게는 광기어린 응원, 딸기에게는 (가방 속에서 꺼낸) 만화 잡지와 (경기장에서 산) 김밥. "굉장한 응원이야" 잡지에서 눈을 들며 딸기가 말했다. 굉장한 응원이었다. 경험과 훈련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응원가, 팔자 구호를 포함한 현란한 기교들, 집에서 신문지로 만들어 온 꽃가루, 어디에서인가 화장실에서 빼내온 화장지, 파란 색 유니폼, 선수들에게 높이 들어올려 보여주는 머플러 , 골이 터지면 좌석 아래에서부터 좌라락 올려가는 대형 앰블렘(여기에 빽빽히 사람이 모여서면 300명 이상은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무슨 혁명기에나 필요할 거 같은 커다란 깃발. 다같이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른다. 팔을 맞춰 올린다. 박수를 친다. 난다도 곧 동참한다.

"이걸 보면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데모에 열광하는 틴에이저 군중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지 않니?",감탄하는 난다. "이대로 들어다가 길거리에 내놓아도 되겠는걸.",동의하는 딸기. 청소년과 관련한 난다가 관심사 중의 하나는 그거다. 열광하는 특유의 성향. 어른들에게는 언제나 이것이 걱정스런 일 중의 하나이고 이러한 성향이 역사적으로 스캔들이 된 적도 많지만 난다는 언제나 이런 일들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방금 열광하는 청소년 시기를 지내왔기 때문일거다.

고등학생 난다는 정치와 영화에 열광했다. 시간만 나면 신문과 영화 잡지를 손에 들었다. 난다는 대학에 가면 운동권이나 영화광이 될테지, 난다 부모의 근심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처럼 되지는 않았다. 대학생이 된 후 사람들과 떼를 지어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공부를 하고 술을 마시러 다녔지만 언제나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극장에는 고등학교 때 이후 잘 가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원했던 걸까, 잠들기 전에 난다는 생각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신문을 읽기만 해도 당시 폭발하던 일련의 상황들에 연루되는 것 같은 느낌에 손이 뜨거웠다. 평일 마지막 회 텅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사람들로 북적대는 축제에라도 있었던 것처럼 가슴이 더워서 버스를 타는 대신 밤거리를 뛰어 다녔다.

지금 말이지만, 고딩 때의 난다는 스스로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과장하는 버릇이 있었고 그렇게 충혈되어 있었는데도 늘 자기가 쿨 하다는 착각까지 했다. 냉소적인 척 했지만 그 때처럼 누군가와 연결되길 원한 적이 없다. 똑같은 하얀 블라우스에 똑같은 단발머리를 한 이 지겨운 여자애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원해. 예컨대 신문에 등장하는 데모대들이나 영화 잡지 속의 즐비한 이름의 사람들은 난다를 다른 곳으로 이끌 것만 같았다. 이 사람들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느끼기를 원해. 그녀는 열광을 위해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필요한 것은 방향일 뿐이었다.

<종교학 개론> 시간, '사람은 자기 나름의 우주를 구축하지 않고는 세계에 진정으로 거주할 수 없다'는 요지의 강의를 듣고 나서 난다는 바로 이거! 라고 생각했다. "형, 운동권이 운동에 헌신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이 비슷한 거 아닐까? 인간에 내재한 이런 '종교적'(배운 단어는 금방 써먹는다) 열정 말야." 함께 강의를 듣는 선배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인간의 본성' 운운 하는 이런 보수적 담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과학'이니(운동은 눈먼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과학에 입각한 거야), '당파성'이니(거기엔 명확한 방향성이 있지), 운동권의 '순수성'이니(넌 그럼 우리가 '데모가 좋아서' 운동한단 말이냐?) 하는 서로 섞이기가 참 힘든 단어들이 선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한참동안 난다는 여러 학생 집회의 현장에서, 죽음을 통과하며 새롭게 탄생하고 싶어하는 집단적 '입사식'을 본 것도 같고, 하나의 고정점에 의지하여 공간을 聖化하여 '세계를 창건'하고자 하는 의지를 경험한 것도 같았다.

한국에서는 청소년 시기가 한없이 연장되기만 한다. 난다만 해도 대학에 들어온 후 한참 동안 명백히 청소년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대학 이전에 그녀는 전면적인 인간 관계를 맺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거다. 공부 말고는 책임져야 할 것이 없었던 거다. 성인이 되기에 필요한 많은 것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녀는 그럴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무 맹렬히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진공 상태의 병이 공기를 빨아들이듯이. 혼자서 키웠던 과장된 열망은 대학에 들어와 실망으로 차차 바뀌었는데, 그러는 동안 그녀는 많은 어리석은 짓을 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무모하게 군 적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다는, 어린 홍위병이나 히틀러 유겐트, 스탈린 소년단 등과 같은 것을 다룬 이야기에 환장한다. 마음이 아프다. 이 모든 것들을 똑같은 것이라고 파악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상이한 현상들 가운데 자신에게 맞닿아 있는 뭔가를 느끼기 때문이다. 난다는 '사용되고 싶고' '소속되고 싶고' '숭고해지고 싶고' '무조건 복종하고 싶은' 그 심정을 알고 있다. 그게 아주 작더라도 빛나는 상징이 주어지기만 했다면, 이름없는 군중의 하나로 몸을 던질 수도 있었다. 서태지에 미쳤던 여고생도 내 마음을 알까?

그 날 경기 중에 운동장 저쪽 하늘에 무지개가 걸렸다. 무지개무지개...하면서 운동장이 일렁거렸다.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고 옆사람을 툭툭 치며 소근거렸다. 잠시동안 모두가 한 곳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무지개를 보아서 좋았고 더구나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아서 좋았고 그렇기 때문에 거대하게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난다는 수원 운동장에 걸린 무지개가 사람들의 열광이 만들어낸 광경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이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너무나도 바랬기 때문에 그 열망이 증발해서 무지개가 생겼다?), 우리들의 열광이야말로 무지개 같다는 생각도 했다. 열망이 만들어 내는 무지개는 아름답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사라지겠지.

우리가 그것을 잡을 수 있을까, 다른 세계로 연결된 다리 같은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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