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월(晶月)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은 김명순과 더불어 근대초기 문단계를 이끌던 알아주는 작가이자 신여성 중 가장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혜석은 1896년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수원삼일여학교와 진명여학교를 거쳐 1913년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입학, 서양화를 공부했다.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의 대표 잡지인 「학지광」과 「여자계」에 참여하여 단편소설 「경희」와 「회생한 소녀」를 발표하였다. 1918년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교편을 잡으며, 작품활동을 했다. 서양화단의 독보적 존재였던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유화전(1921년 3월 19-20일)을 열었다. 당시 매일신보의 기사에 따르면 `첫날 입장자가 1,000여명, 다음날에는 5,000-6,000여명이 밀려들었으며, 전시품 중 최고가(250원)인 「신춘(新春)」은 경쟁 속에 팔리고 그 외에도 예약의 딱지가 많이 붙었다'고 하니, 나혜석에 대한 담론이 (학계만이 아닌) 대중들에게도 자리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사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 나혜석은 김명순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자세로 새로운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녀는 소설을 통한 상징적인 형상화 뿐 아니라, 인터뷰와 여행보고서, 비평문 등을 통해서 `신여자주의'를 주장했다. 「삼천리」라는 잡지에 유럽 기행을 연재하면서, `신양성(新兩性) 도덕의 제창' 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 주요 내용은 우애(友愛)결혼, 시험(試驗)결혼에 관한 것이었다. 남녀의 결혼 목적, 성욕과 생식, 잘못된 결혼과 이혼문제, 새로운 도덕과 이혼문제, 성교육문제 등 전반적인 의식개혁에 관해서 의견을 표시하였지만, 봉건적인 당시 상황에서는 받아들여지기에 무리가 있었다. `여성 개인의 해방'에 대한 그녀의 직접적인 의사표시는 `별건곤'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나의 생각은 일반 여성은 성적으로부터 먼저 모반을 하여야 될 것이야요. 식색(食色)이 다 마찬가지란 말이야요. 그러한 관념을 가졌으며 문제될 거이 없겠지요. 시장할 때에 밥먹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겠지요.

식색(食色)이 동일한 욕망으로 묶여진다는 주장, 실패한 결혼은 이혼으로 마무리하여야 한다는 정월의 주장은 획기적인 여파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단지 연애 성 결혼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를 표방했다는 것만이, 그녀를 `유명무실한 문학가이자 방종으로 몰락한 여성'으로 낙인찍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다.

나혜석은 자기 고백적이고 자서전적인 글들을 많이 썼다. 이러한 글들은 그녀 스스로에 의해 공개되거나 언론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그간의 연애 성 결혼에 대한 나혜석의 주장과 그녀의 자전적 삶이 연결되면서 대중적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혼 후 3년 만인 1934년 나혜석이 남편에게 보내는 장문의 공개서한인 「이혼고백서」는 「삼천리」8 9월호에 연재되었으며, 「최린제소장」은 동아일보기자에 의해 공개되었다.

또한 그녀에 대한 당 후대 회고작업이 그녀의 후반기 - 즉, 최린과의 밀회로 인한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개인미술전의 실패, 부르주아적 의식화로의 정착 - 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녀를 왜곡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작업들은 크게 허구적인 전기 혹은 풍자적 소설과 그녀의 부르주아성과 반민중성을 비판하는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비평으로 나뉜다.

나혜석의 허구적인 전기작업에는 김항명, 1974, 『살아있는 성좌』, 대한서적공사와 정을병, 1978, 『火花書』, 제오문화사를 들 수 있다. 나혜석의 반민중성과 서구중심성에 대한 비판은 박석분 박은봉, 1994, 『인물여성사 - 한국편』, 새날에서 대표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신여성들의 출현과 자유연애. 1920년대의 한편에서는 이처럼 조선화되지 못한 서구사조의 영향으로 왜곡된 여성의식으로서 자유연애론이 주창되고 실제로 그렇게 `자유'를 구가하는 신여성들이 속출하여 민중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중략)…

사활이 걸린 민족의 현실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그 속에서 민족의 고통을 예술로 형상했더라면,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 민중의 삶을 형상했더갈면 지금 우리에겐 나혜석의 이름으로 도니 소중한 민족미술이 남겨졌을 것이다.

나혜석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은 분명히 타당하지만, 이 역시도 신여성들을 `놀라 자빠질 만한 자유연애'를 했다는 식으로 빈정거렸다는 점에서 신여성에 대한 스캔들-상업적 담론과 유사하다.

이 같은(조국의 암담한 현실로부터 도망하고자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파리에서 최린과 바람이 났고, 남편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했다'. 이에 대해 비판이 일자 그는 오히려 조선의 미개함을 개탄했다.

그녀가 스스로의 정체성으로부터 추상하여 생각하였던 전체 여성현실에 대한 판단은 `ㄱ부터 ㅎ까지' 모두 틀려먹은 것은 아니었다. 비일관적인 여성해방을 주장했으며, 민중여성의 현실에 대해 문외한이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근대적 여권에 대한 의식적 계몽에 힘썼다는 것이다.

`인형의 집'

나는 인형이었네 /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 남편의 안해 인형으로 / 그네의 노리개이었네

후렴

노라를 놓아라 / 순순히 놓아다고 / 높은 담벽을 헐고 / 깊은 규문(閨問)을 열고 / 자유의 대기중에 /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 남편의 안해 되기 전에 /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 /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 자유의 실이 열렸도다 / 천직(天職)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어 / 깨어서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휘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빛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