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됨의 정치학을 위하여  ★

 

영화를 볼 때 건 길거리를 지날 때 건 여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된다.
남자의 얼굴이 내게 별 감흥이 없는 것에 비해 여자의 얼굴은 자주
사무치는 느낌을 준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것 같은
깊은 감정. 여자들의 얼굴은 읽힌다.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기의 얼굴, 소녀의 얼굴, 또래의 얼굴, 어머니의 얼굴,
할머니의 얼굴, 수없이 마주치는 남의 얼굴에서 나를 본다.

거울을 닦는다. 당신을 보기 위해서 이다.
내 얼굴에서 읽힐 당신과 공유하는 역사와 경험의 표지.
당신은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 거울 속은 조용하다.
그녀는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가.

일찍이 신은 자기 자신이었다. 신은
자기를 닮은 존재를 만들어 내었고, 그것을 인간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의 갈비뼈로 그와 닮은 존재를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이다. 신이 말을 하던 시대에 신은
"내가 한 말을 내가 했다"고 했다. 신이 말하기를 그치자 바로
남자들이 신의 말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신의 말씀-진리이다."
자, 이제 여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뭐라고? 잘 안 들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이런....
진리의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 않고 진리의 문법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가 없다.

헤겔에 있어 시민 개념은 그야말로 '남성 시민'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고 맑스의 계급 분석에 있어 여성은
아버지 혹은 남편의 계급과 동일시된다. 그녀의 주체성은
(남성)시민이라는 가상적 동일성에 환원된다.
그녀는 오로지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관계 속에서 위치 지워질 뿐
생산의 영역인 공적 영역에서는 삭제된다.

이러한 사실은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성적 차이에 근거한
주체로서의 여성,의 역사가 가부장제 및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새롭게 쓰여져야 함을 의미한다. 즉 여성들은 그들의
독자적인 경험에 근거한 생산 및 재생산의 역사를 복원해내야 한다.
'남녀 공동의 공간으로서의 공동체'-즉 남성 여성 모두 실질적인 주체로서
각자에게 적합한 권리를 부여 받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은
여성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주체로서
자기 역사 서술 과정을 행함으로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을 하자'고 이야기했다.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란 뭐지?'
동그란 테이블 위에 물음표들이 둥둥 떠다녔다. 누구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명쾌하게 규정 지을 수 없었다.
여성, 여성이라는 텅 빈 말, 여성이 누구인지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성이라는 집단 내에 존재하는 헤아릴 수 없는 차이를 뭉뚱그려
그저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누군가가
'우리는 딸들일 뿐이야' 라고 말했다. 우리는 딸이라는 이름이
아버지라는 가장과의 예속적인 관계 속에 위치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한국 사회라는 커다란 가정은 우리와 같은 젊은 여성을 그저
'딸아이'들로 여긴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러한 것이 현실,
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했다. 그러나 딸은 어머니의 딸이고,
또한 그 딸의 어머니이다. 남성의 신은 그 자신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무릇 모든 인간은 어머니가
배가 아파 낳는다. 우리는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예속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딸아이 말고
우리의 '딸'을 낳자고 이야기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딸됨' 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딸'이란 자기자신을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존재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관계뿐 만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수많은 딸들에 대한
수평적 세대의식을 포함해야 할 것이라고 또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한 세대의식이란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사람들의 의식이라고,
세상을 변화 시키면서 이어갈 사람들의 의식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세계를
끊어낸 자리에서 자기의 주체를 세워나가지만, 딸들은
부모를 부정하고 넘어선 새로운 자리에서 부모를 안아 들여
더 큰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또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딸들이었다. 우리 앞에는
닫혀진 세상의 문이 있었고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보기 위해
힘들게 조금씩 그 문을 열 것이었다.
어떤 말로 하면 좋을지 몰라 이렇게 더듬거리고 버벅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바로 그 시작이었다.

나는 20대 초중반의 여성이며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 이라는 과제.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딜레마를 제공한다. '여성으로서 성공적으로 사회에 편입하는 일과
남성적 사회의 기본 토대들을 비판하고 억압적 조건에 저항하는 일을
어떻게 양립시킬 수 있을까.' 또한 나에게는 成人으로서의
개인적 성장을 이룩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여기에서 경제적 자립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 조건인 것은 아니다.
결혼하지 않은 딸은 언제까지나 지붕 아래 막내딸로 간주되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부모의 지나온 삶,
그들의 계급성으로부터 비롯한 부모의 욕망과 기대,
그것이 형성해 온 나 자신의 모순됨 등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충분히 강한가?

내가 이런 딜레마들에 대해 싸우고자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도대체 누구와 스크럼을 짜고
어느 바닥에 누워 무엇에 대해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한국 여성 운동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포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계급, 지역 및
여타 문화적인 차이 속에 산재되어 있는 여성은 여전히
'여성'으로서의 독자적인 자리를 가지지 못한 채 타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 여성 운동은 독자적인 세력화에 대한 고민 속에
보다 다양한 지점의 여성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전략들을
찾아내야 한다. 각각의 여성들이 제기하는 다양한 문제들은
여성 운동 내에서 해방적 전망 아래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성 억압의 원인을 단순히 가부장제로 환원하고
성적인 차이에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이를 무시하는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계급, 지역 및
구체적 차이들에 대한 인식은 여성 운동이 인간 해방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고 또 다른 환원으로 억압을 재생산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한 쉬임없는 자아의 확장은,
배제와 억압을 낳는 권력에 대한 투쟁을 중심적인 과제로 삼는
우리의 운동을 연대의 정치학으로 승화시킬 것이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운동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언어를 가지지 못한 타자,
중심에서 배제된 주변부, 주류를 거스르는 소수자의 대표라는 의미에서
'여성'은 우리 운동이 시작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에 의한 배제와 억압이라는 동일한 공간 속의
모든 타자와 주변부, 소수자에 주목한다. 여성 운동이 출발하는
억압지점과 여성 운동이 가져오게 되는 해방의 측면은
모두 이들 소수자와 공유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타자와 주변부에 대한 지배 체제의 배제와 억압이 제거되지 않는 한
진정한 여성 해방, 인간 해방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려고 한다. 피지배 집단 하나하나가
각자의 생존 공간을 확보하고 각자의 서사를 작성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대안적 미래의 구상이 가능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가진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소심함,
비관적 전망을 의식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감정들이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아야 했던 애정과 안정감의 결핍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구절을 어느 책에선가 읽고 가슴이 아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오빠가 가진 빛나는 자기 확신과
인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서로 이마를 밟고 올라서는 형제들 대신에,
한 줄로 손잡은 당신의 자매들, 당신의 딸들이 있다고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서로 이해하는 일이 힘이 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당신과 함께 배우고 싶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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