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나라에서 글쓰기 - 나는 세계의 속살을 만진다(4)

 

새벽녘. 퀴퀴하고 지저분한 자취방에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 둘이 마주앉아 잔뜩 쌓인 과자봉지를 뜯는 모습, 기괴스럽다는 느낌마저 든다.
묵묵히 먹을 것을 먹던 여자가 우물거리며 입을 연다.

"고마워요. 여기까지 따라와주고"
나는 살짝 웃기만 한다.
"근데..."
여자는 우물거리는 것을 멈추고 진지하게 나를 바라본다. 왠지 불안하다.
"네?"
"아, 아녜요."

여자는 멈칫거리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다그쳐 묻지 않기로 한다. 난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조차 잘 모르므로. 난처하다. 어떻게 해야하나, 무언가 이야기를 해야하는 것인가. 피곤한 척 잠이 들어버리는것이 가장 현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멍하고 피곤한 척을 하기 위해 졸린 듯 눈을 자꾸만 깜박거린다. 하지만 여자는 나의 그런 행동에는 무신경한 채 자꾸만 입속으로 먹을 것들을 집어넣으며 멍하니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어려운 부탁 하나 해도 되나요?"
"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것만 같은 불안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매우 놀란 척 대답한다.
"음. 그러니까. 저..."
여자는 뜸을 들인다. 뭔가 계산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뭐죠?"
"음. 저기, 부탁을 좀, 처음 만나는 분께 이러면 안되는데, "
"뭐냐구요?"
나는 좀 짜증이 섞인 투로 이야기한다. 당황한 여자는 작은 쪽지를 내 앞에 내민다.
"이게 뭐죠?"
"전화번호에요."
"누구의?"
"오늘 헤어진 제 남자친구에요."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거죠?"
"전화를 좀 해 주세요"
"제가요? 왜요?"
짜증과 불쾌감이 잔뜩 섞인 내 목소리에 여자는 돌연 사납고 날카로운 눈빛이 된다.
"싫으면 말아요.! 뭐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기분 나빠 할 건 없잖아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쏟아 부은 여자는 말을 마치자 마자 '아차'하는 표정을 짓고 만다. 그리고는 갑자기 우울해져 다시 주섬주섬 신문지 위의 과자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먹는다. 나는 방안을 흐르는 무거운 공기를 견뎌내지 못한 채 여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 없나요?"
"그냥 그 남자에게 전화를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많이 아프다고 아주 많이 아파서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해 주세요. 아참 그 남자는 내 이름을 채리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전화하시는 분은 순미라고 해 주세요. 그 사람도 아는 친구니까 별 의심 안 할꺼에요"

내가 약간의 관심과 수긍의 빛을 보이자 여자는 안도의 낯빛을 띄며 뭔가 본격적으로 말해야겠다는 듯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여자의 주문은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자기는 너무 아파서 전화를 걸 수조차 없는 것으로 해 달라는 것, 그리고 함께 있다 갑자기 아파해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해달라는 것 등이 고작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 여자의 눈빛에는 체념 섞인 애증과 스스로도 불결하다고 여기며 떼어내 버리고 싶어하는 듯한 그리움이 베어있다. 나는 비로소 그 여자의 부탁을 수긍하기로 한다.

"아직 일곱 시도 안되었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해도 되는 건가요?"

어떻게든 주어진 일을 모면해 보겠다는 듯 나는 한번 더 뜸을 들인다. 여자는 초조한지 잠시 내눈치를 살피더니 괜찮다고, 아침 출근을 위해 일어나 있을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도덕적인 부담감보다 그저 나와 관계없는 이 일에서 빨리 벗어나 숙면을 취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별 망설임 없이 수화기를 든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개시에 당황한 듯한 여자는 수화기를 움켜쥔 내 손을 자신의 두손으로 감싼다.

"잠깐만요."

여자는 심호홉을 하는 것인지 몇 번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수화기를 내 귀와 입에 대어주고는 종이 쪽지 속의 전화번호를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천천히 꼭꼭 눌러댄다.

"따르릉"

신호가 울리고 나는 연극의 주요한 배역을 맡은 여배우처럼 득의양양하게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따르릉. 따르릉."

벨소리가 길어지고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을수록 자신감은 사라지고 초조해진 나는 자꾸만 그 여자를 힐끔거리게 된다. 이제 그만 끊으라는 말을 기다리는 걸까? 하지만 그 여자는 나의 그러한 힐끔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고도 집념에 찬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10번쯤 신호가 울렸을까? 집이 비었거나 잠에 아주 깊이 빠졌거나 어쨌든 절대 전화를 받지 않으리라는 나의 기대를 무너트리고 전화선이 열렸다.

"누구요?"

출근을 위해 일어나 있을 거라는 여자의 말과는 달리 남자의 목소리는 잠에 푹 절어있다.

"저 고진만씨댁이죠?"
"내가 진만인데 댁은 누구요?"

남자의 목소리는 껄렁껄렁하면서도 화를 억지로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이제 내 대사를 할 차례임을 깨닫고 마른침을 한 번 삼킨다.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 부터 갑자기 긴장되어 있는 나를 나보다 더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 저는 채리친구 순미라고 하는데요, 지금 채리가 갑자기 많이 아파서..."
미처 준비된 대사를 다 하기도 전에 남자는 말허리를 자른다. 채리라는 이름을 들은 것이 억누른 화를 폭파시켰다는 듯이.
"채린지 째린지 너도 그년이 시켜서 전화한거지? 씨발, 드럽게 끈덕지네. 누가 지가 좋아서 어울려 준 줄 알아? 아무도 안 놀아 주길래 불쌍해서 몇 번 놀아줬더니 분수를 모르고 어디서 지랄이야 지랄은. 에잇, 아침부터 재수 없게."
"저, 저기 채리가 아프거든요 많이."
나는 남자의 예의 없음에 대한 울화를 참고 내 몫을 다 하겠다는 듯이 성실하게 말한다.
"쳇, 아프다구? 내가 그년 애뱃다고 징징거리는 통에 잠을 못 자 잠을.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순순히 몸을 굴리래? 그리구 내가 애때고 몸조리하라고 30만원이나 줬어. 알기나 해? 한번만 더 이딴전화하면 그년하고 전화하는 년하고 다 사생활 침해로 고소해버릴꺼니까 알아서 해!"
순간 내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동시에 가슴에서 무언가가 복받쳐 오른다.
"야! 너 말이면 단줄 알아?"

치미는 분노를 참다못한 나는 수화기 저편으로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채 한마디도 하기 전에 '뚝'하고 전화가 끊긴다. 여자의 손에 뽑힌 전화선 코드가 들려있다. 여자는 상황을 이미 알아챘다는 것인지 별 관심이 없는 것인지 조용히 퀴퀴한 이부자리를 펴는데 열중한다.
여자가 묵묵히 깔아준 이부자리에 몸을 누인다. 나란히 누운 여자와 나, 말이 없다. 사실 할 말이 없기도 하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운명인거라고, 여자는 자신을 다스리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다스리기만 해야한다면 그건 얼마나 화나는 일인가. 화난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잠시간 머리가 복잡해질 무렵 여자가 조용히 입을 연다.

"고등학교때, 불어를 배웠어요. 2학년때 이던가. 친구가 가지고 있는 소설책을 보게되었는데 까뮈의 페스트였죠. 페스트. 병이죠. 아주 지독히도 더럽게 나쁜 병. 그 소설을 읽지는 않았어요. 그게 병인 것만 아는 정도였죠. 근데 어땠는지 알아요? 한글로 페스트라고 써져있는 아래 원어제목이써져있는데. 세상에. 여성형이더라고요. 그 무서운 질병이. 여성명사에요."

여자는 또 다시 웅얼웅얼거린다. 나는 긴장이 풀어지고 갑자기 흥분했던 탓인지 졸음이 몰려온다. 여자, 그 이후로도 계속 웅얼대는 것 같은데, 나는 이미 혼곤한 잠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도 여자의 마지막 말은 어떤 울림처럼 슬프게 뇌리에 박힌다.

"그 무서운 질병이, 여성명사에요."

해가 떴는지, 불을 켜지도 않았는데 방안이 제법 환하다. 눈꺼풀 아래로 드러난 모습에 나는 잠시 망연해한다.
'여기가 어디더라'

밤사이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지만 그 짧은 공백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는다. 여자는 이불을 몸에 돌돌 만 채로 잠이 들어 있다. 밤을 벗은 세계는 더 이상 민감하고 여린 속살이 아니다. 두터운 각질에 싸여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뻔뻔한 갑각류 같다. 나도 뻔뻔해 지기로 한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선다. 쪽지라도 한 장 남겨야 하는 것이었나 잠시 고민을 했지만 나는 곧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고 있다. 나에게 있어 밤과 낮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이므로. 나는 밤에 내가 저지른 일과 밤에 내게 일어난 일을 잊기로 한다. 지금은 낮이므로 밤이 되면 달라질 지도 모른다. 밤이 되면 밤의 그녀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다시는 찾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다. 모든 것은 밤이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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