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계에 뿌리박은 `그'들의 공포(anxiety)

페미니즘에 대한 공포는 다양한 형식으로 드러나며, 그러한 공포를 반영하는 보여주는 텍스트들은 매우 많다. 예컨대 영화 <에이리언>을 페미니즘에 대한 공포의 표현으로서 해석하는 관점이 있다. 쥬디스 뉴튼은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 관점에 의해 <에이리언>의 유토피아적이며 억압적인 면을 보았다. 리플리의 역할에서 주목할 만하게 개인적인 행동이 기본적으로 사회적이며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들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는 것, 여성들이 단지 개인적인 수준에서가 아닌 공적인 영역의 공포를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유토피아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성을 거세한 괴물같은 여성 그리고 남근적 에이리언으로 남성의 공포가 전이된 것이라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그래서 페미니즘과 관계하여 본다면 리플리에게 전통적인 여성적 특질을 회복시키는 마지막 장면으로 보아 오히려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집단적이고 잠재적이고 급진적인 힘으로서의 페미니즘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고 생산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이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라는 사실, 또는 융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 정도만 떠올려 본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공포가 현대 정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공포는 가까이는 19세기부터 이어져 왔다. 여성들의 절대적 종속의 시기이자, 페미니즘의 탄생을 목도한 시기인 19세기에 `여성이 하는 일은 어떤 것(말이나 행동 모두)이나 남성들에게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공포는 바로 텍스트에 반영된다. 예컨대, 19세기의 문학은 황폐화된 가정, 바람 피우는 남편이나 알콜 중독에 걸린 남편, 결핵에 걸리거나 병약한 아이들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이들은 모두 `노라'의 잔인한 경쟁자들이 만들어낸 애처로운 희생자들이었다. 문학이 만들어낸 이 기이한 환상은 실생활에서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지만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들이 체계적인 이야기로 꾸며졌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여성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당시의 여성들이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일순간이나마 시간을 내서 자아를 주장하는 여성, 완전히 헌신하지 않는 여성은 이미 위험하고, 죄를 저지른 것이다. 실생활의 남편들은 문학에서보다는 분명히 상처도 덜 받았고 걱정도 덜 했을 테지만 환상의 영역인 문학은 그들이 어떤 타협에 동의하는 것을 아주 불편해 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의 환상은 항상 후회와 불안감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보다 늦게 여성해방(페미니즘)의 이념을 도입한 우리 나라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불안은 예외없이 드러난다. 나는 얼마전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을 발견하였다. 참된 페미니즘을 위한 성찰 - 한 몽상가의 페미니즘론 이라는 제목의 이 책이 담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편파적이고 조야해서 굳이 반박해야 할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지만, 이 책의 필자가 가지고 있는 정서는 우리 시대 많은 남성들의 정서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페미니즘은 또 가부장제와 함께 당대를 지배하는 양대 기제 가운데 하나인 자본제의 폐해에 대해서는 대충 입을 다물고 있고, 적어도 실천적인 면에서 보자면 공동체의 가치보다는 여자의 사회적 활동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리하여 페미니즘은 학문과 운동, 양편 모두에서 여자들 자신을 오도하면서 마침내는 위기적 징후가 차츰 더 뚜렷해져가고 있는 사회적 부패나 타락 현상을 더 촉진시켜 가고 있다. 그런 판에 합당한 비판도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방치·방관되고 있는 형편이고, 그렇기에 페미니즘적 현실은 차츰 더 악화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페미니즘은 당대에서 가장 우려되는 문화적 현상 가운데 하나가 된다. 얼마나 거센 확신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인가. 나는 시대의 확신을 두려워한다. 더구나 나의 상대인 페미니스트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목표일 듯 하다. 나는 그들의 확신을 두려워한다.

여러 근거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에서 확실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그의 공포'이다. 페미니즘의 등장과 부상은 확실하게 두려운 것, 위험한 것, 우려스러운 것이다. 그러한 공포는 얼마전 페미니즘에 대한 원색적 비난으로 인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소설,이문열의 선택 에서도 보여진다. 이문열은 정부인 장씨의 입을 빌어 페미니즘/페미니스트에 대한 그의 정서를 피력한다.

... 다행히도 바람의 방향은 바뀌었다. 전 시대의 억압과 질곡은 끝나고 여성들은 제도 속에 매몰되었던 자아를 찾아냈다. 이제는 누구도 이 세찬 흐름을 되돌려 놓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를 보는 이 마음이 기껍지만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 탓이 컸겠지만, 선택 은 그 내용에 찬성하는 사람이건 반대하는 사람이건간에 상관없이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나 역시 `도대체 어느 정도로 썼길래.... 한 번 읽어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을 들락거렸었다. 그러나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어에 `선택'을 치고 엔터키를 누른 다음 화면이 보여준 결과는 항상 같았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선택 여섯 권은 항상 `대출 중'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서 선택 을 대출받아 읽는 행운을 불행하게도(?) 단 한번도 누리지 못하였다. 유심히 주의를 관찰한 나는 내 주위의 많은 남성들이 선택 을 읽었고, 은근히 통쾌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올라있는가를 보라. 페미니즘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하면서 파시스트적 복고주의 -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소설이, 한편으로, `시대적 공감'을 획득한 것이다.

이쯤에서 얼마 전 들은 내 친구의 이야기를 인용해도 좋을 것 같다. 그 친구는 얼마전 과 교수님께서 `바야흐로 여성들의 세상이 도래'한 것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여학생들의 기가 너무 세고, 남학생들의 기가 너무 약하다'고, 그러므로 `남학생들이 보다 남자다워져야 한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래야 '정상적인` 세상이 된다, '자연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뜻일까?) 앞서 언급한 한 몽상가나, 이문열 씨도 '바야흐로 여성들의 세상이 도래`했음에 깊이 공감하는 듯 하다.

어쩌면 감각의 차이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애에서 내가 느낀 거센 물결들 가운데 하나인 1980년대의 맑시즘보다 현재의 페미니즘이 훨씬 더 거센 듯 하다.....여성운동이 침체되어 있다는 표현이 몹시 낯설었다. 나는 현재의 여성운동이 지나치게 활황세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기한 남성들의 공감은 "실제 현실이 어떠한가"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는 항상 깊이 패인 틈이 존재한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혹은 우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관념을 벗고, 맨 눈으로 현실세계를 들여다 보았을 때, 실제로 `페미니즘/여성운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되는가? 과연 21세기를 목도하는 지금, 여성의 지위는 안녕한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가부장제는 흔들리고 있는가? 페미니즘은 성공한 것인가?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그 용어가 확보한 친숙성과 상품성에도 불구, 그 내용이나 성과면에서 여전히 빈약하다고 본다.

90년대 문화 영역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담론'- 예컨대 여성문학, 여성영화비평, 여성연극 등등에서 - 이 급격히 부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생활에서 여성의 지위가 (남성들이 위협을 느낄만큼) 빠른 속도로 향상된 것은 아니다. 80년대 여타 진보 운동과 함께 싹을 틔웠던 여성해방운동은, 90년대 들어 이념적 기반이었던 맑시즘의 후퇴와 더불어 다른 진보 운동과 함께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억압의 현실, 여성운동의 현황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접어두기로 하고, 어쨌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현사회는 가부장제이며, 그것은 그것의 존재 자체를 흔들만큼의 위협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 소수'로 남아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은, 오히려, 여성억압의 현실이 더욱 교묘해지고 정교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현 시기에는 "20세기 특유의 가부장적 태도"- 겉으로는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고 있는 듯하지만 교묘히, 그러나 철저하게 구속, 견제, 억압을 행함으로써 결국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 - 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