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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여성의 출현과 `Stereo Type'으로의 정착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국내 여학교나 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조선사회에 하나의 사회적 범주로 등장한 것은 1920년대였다. 1920년대는 `여자교육운동'이 펼쳐진지 약 10-20년이 지난 시기로, 근대적 교육을 받은 1세대 여성들이 자라나 성인이 된 시기이다. 또한 1920년대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통치로 통치전략을 바꾼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형식적이나마 출판과 문화, 집회의 자유가 가능해졌으며, 여성들은 이를 십분 활용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속에서 제 1세대 교육 받은 여성들은 교육계몽운동, 여성교육, 물산장려운동 등을 주도하는 자유주의 혹은 부르주아 여성운동단체를 형성했다. 조선여자교육협회, 조선여자 청년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토산애용(土産愛用)부인회, 조선여성동우회, 근우회 등이 대표적인 1920년대 단체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 여성해방운동에 포함되면서도, 강고한 조직에 반하지 않고 철저히 개인적인 활동을 취한 급진적인 여성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이다. 이들은 반봉건의 문제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여 당시 여성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연애론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그것을 여성해방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이들을 보통 `제 1세대' 신여성이라 한다. 세사람의 공통점은 자유주의/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아 연애문제, 결혼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접근해간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인습에서 탈피하자'라는 슬로건 하에 `신여자주의' 를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시 일본 지식인층에서 유행하던 입센의 [인형의 집]과 유럽의 여권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제 1세대 신여성들의 여권의식이 정교다고 볼 수는 없다. 일제말기 봉건제와 가부장제를 싸워야 할 대상으로 올바르게 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저항을 개인의 무한한 자유 특히 연애의 자유로 구가하려는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개인주의적인 실천은 대중기반을 획득하지 못하였으며, 실천의 결과 얻게 된 희대의 스캔들은 그 당시에는 여론의 빈축을 샀으면, 세사람 모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세사람의 삶과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은 그 이후 역사에서 계속적으로 되풀이 되었으며, 하나의 유형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신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 외부의 시선 신여성들을 평가하는 지배적인 경향은 `풍문 또는 스캔들 중심'의 연구이다. 신여성들을 이런 식으로 읽어내는 사례는 `이명은. 1956, 「흘러간 여인상」, 인간사 ', `박종국 박노준, 1965, 「흘러간 성좌」, 서울신문사', `김동인, 1939. 3. 5, 「김연실전」,『문장』', `전영택, 「김탄실과 그 아들」, 『현대문학』vol.4', '염상섭, 1954. 1, 「추도」,『신천지』', `이옥수, 1985,「1920년대 초기 문단, 화단의 선구여성」, 『한국근세여성사화』, 규문각', `김기진, 1024. 11,「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신여성』등 등에서 볼 수 있다. 허구전적인 전기에서부터 역사상 의미있는 동인지 - 심지어 신여성 자신이 편집주간인 『신여성』 -에까지 신여성에 대한 외부적인 시선의 대부분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이 중 두드러지는 악평은 문단의 김동인으로부터 이루어졌다. 김동인은 김명순을 빗대서 「김연실전」을 썼으며, 이 세사람이 '작품없는 문학생활에 골몰했다`고 씹어대었다. 비단 남성 뿐 아니라, 후세대 신여성의 명맥을 잇는 최정희 조차 남성들의 독법을 쫓았다. "과거에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명순, 김일엽씨 등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현금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검토해보건대 찬성할 수 없는 공적과 결과를 지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후에도 살펴보겠지만, 이같은 평가들은 초기 신여성들의 실제적인 삶에 대한 실사(實事)를 무시하거나, 이들의 수많은 작품을 `의도적으로' 등한시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김명순의 경우만 하더라도, 1939년까지 총 18편의 소설과 번역소설 1편, 시 60편, 번역시 9편, 11편의 수필 평론, 희곡 1편 등 약 100여 편을 발표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의에 찬 평가는 이들의 삶을 허구적으로 재생해내어 대중적인 흥미를 모아낸 오락적 기능을 하거나, 허물어져가는 도덕 윤리에 대한 경계심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신여성들의 주장에서 정치적 의미를 탈색시킨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부분을 정치적으로 확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신여성들의 작품활동은 `선데이 서울'의 선정성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서구의 새로운 사상 정도로 협소화 되었다. 같은 시기 비슷한 주장을 펼쳤던 `근우회'에 비해 이들의 활동은 사회에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저 센세이셔널한 구경거리였을 따름이다. 이같은 방식으로 일제말 한국 사회는 밀려오는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에 대한 공포를 덜어갔던 것이다. 신여성들은 봉건제 하의 여성억압을 타파할 것을 주장했으나, 그녀들의 말은 사회의 억압을 비껴나가기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