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스타일을 주도하고 지배하는 것, 이것은 사회의 이행과 유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겪었다. 토지에 기반한 전통적 인 귀족과 상업, 무역, 제조업에 기반한 신흥 거부들이 존재하고, 금권은 귀족과 밀착 하게 되었다. 명망 높은 명문가라는 이름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자작 또는 백작 이 거부의 딸과 혼인하고, 돈있는 상인은 기사, 준남작 등의 작위를 합법적으로 돈을 주고 '구입'한다. 귀족의 현실적인 힘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돈의 힘이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커다란 도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전기 자본주의 시대의 대도시는 완전 한 소비도시로서, 큰 도시들이 그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류층의 극도의 사 치로부터 기인하는 최대의 소비자 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 랑과 사치와 자본주의'라는 책에서, 초기 자본주의 발달의 원동력을 남녀간의 성관계, 여인들의 생활양식, 사치의 전개 등의 요인에서 찾고 있다.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특수한 사회계층의 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이 시기의 시대정 신은 궁정 귀족 사회, 게다가 그것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던 사회의 정신을 의미한다. 모든 상류사회의 생활 습관을 규정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궁정 사회였고, 궁정 사회 자체의 생활양식을 주도한 것은 군주와 귀족들의 애첩들이었다. 궁정 여인들의 삶과 남녀 관계는 지배적인 생활 스타일을 주도했다. 이것은 풍성하고 여유 있는 생활양식 을 유발했고 그로써 새로운 형태의 사치를 창출했다. 이 시기에 진행된 사치의 옥내화 , 즉물화, 섬세화, 감성화라는 생활양식은 도시화의 덕분으로 널리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그러한 사치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생활양식 -말투라든가 옷의 스타일, 감성과 사고의 코드-은 따르고 싶은 유행이 되었다. 시대 정신이란 것이 본래적으로 특수한 계층의 정신에 불과한 것이지만, 다른 많은 계층의 스타일 또한 규정하게 되기도 한다. 궁정 문화에서의 남녀 관계의 변화, 사치의 전개, 이와 함께 일상 적인 생활 양식의 변화는 그 시대 '교양 있는 사람'의 표준이 형성되 고 사람들에게 각인되게 하는 기제가 되었다. - 베르너 좀바르트에서 인용

<현재 남한에 돔이 존재하고, 이 돔안의 여성들의 삶은 많은 여성들이 따라하고자 하 는 지배적인 생활 스타일을 주도한다.>

서기 2000년을 바라보는 무렵인 지금, 남한 사회에 돔이 존재한다. 집에 돌아오기 위 해 분당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 분당에 진입할 때면, 한눈에 보이는 분당의 전경은 분명 돔의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상 과학 영화에서의 최첨단 우주 기지를 연상하게 한다. 이사를 오기 전 20년간 '강남'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살았던 때를 떠올려 본다. 서울의 강남, 존재하고 있는 그 돔의 내부이다. 강남의 고급 아파 트 단지, 똑같이 생긴 아파트의 어느 집안을 들어가 보아도, 똑같이 생긴 가족들이 살 고 있다. 부모와 자녀의 네 식구, 단란하고 화목한 핵가족, 높은 교육 수준, 교양 있 는 문화 생활, 적당히 풍족한 경제 수준. 그 곳의 아이들은 순진하고 착하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적어도 돔 안에서는 더 잘사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도 심각하지 않고, 세상의 험한 꼴과 힘든 삶은 세계의 바깥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에 대 한 비난은 종종 이 돔으로 향해지지 않는다. 이 돔은 극도로 상층인 거부들을 포함하 지는 않는다. 이 돔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표준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기준으로 자리 잡 았다. 실질적으로 이 돔은 사람들 생활의 평균치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임을 잠시 지적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삶의 기준적인 수준 이 된다는 것이다. 이 돔은 70년대 이후 강남의 고급 아파트 단지로부터 형성되고, 90 년대 수도권의 몇몇 신도시로 확산된, 도시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문화적, 지역 적 공간이다. '강남'을 단지 서울의 어느 지역이라는 지리적인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문화와 스타일, 분위기라는 것을 포괄하여, 이러한 문화를 '강남 문화 '라고 칭해보자. 고등 학생 이상의 자녀를 가진 세대는 '자수 성가' 하여 서울에 정착 하면서 이러한 공간들을 만들어 낸 주역들일 것이고,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들은 그 들 자신이 이 돔의 출신인 '강남 문화권 토박이'들이 많을 것이고, 이쯤 되면 이 문화 권은 완전히 정착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옥표씨는 논문 '도시 중산층 가족 생 활과 주부의 역할'에서 도시 신흥 주거 지역의 아파트 단지 내 주민들에게 독특한 생 활 문화적 특징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아파트라는 독특한 주거형태와 이를 통하여 구 성된 인위적 커뮤니티,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가구들의 동질성 -예컨대 고학 력 주부, 사회적 지위 있는 남편,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4-~5인의 핵가족, 남성과 여 성의 생활 공간 확연 등등-, 동네 공동체에서의 여성의 월등한 통제력, 가족에서 주부 역할의 증대, 경제력과 학력의 기반하에서 다양한 교양이나 문화 기제에의 용이한 접 근..... '교양있는 생활 스타일'의 전형을 이 공간에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와 아내는 고도의 능력을 요하는 전문직이다>

한 달 전쯤 TV 뉴스에 나온 이야기. 초등 학생 자녀를 둔 주부들이 '대학'때의 전공 -미술, 음악, 영어 등등-을 살려서 방과후 돌아가면서 자녀들을 과외지도 시킨다는 이 야기였다. IMF 시대, 그렇다고 자녀 교육에 허술할 수는 없는 일. 알뜰하고 현명한 어머니들로 극찬 받음.

대형 백화점에서의 주부대상의 문화 강좌. 요리, 꽃꽂이에서부터 댄스, 문학, 영화, 경제 상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내용도 전문적이다.

강남 문화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단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중산층 주부의 생활 양식이다. 신현모양처. 이 곳의 전업주부들은 거의 수퍼 우먼급의 능력 있는 여성이다 .

수입을 규모 있게 운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부의 몫이다. 가족의 식생활을 책임지는 것도 주부이다. '식생활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공해 식품, 부정 식품에 대한 경계가 요구되고 성인병 비만증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가족원들의 기본적인 소비 생활을 담당하는 것도 주부이다. 이들의 구매 행위는 생필품 만이 아니라, 남편이 참가해야 할 경조사의 선물 등등 거의 가족원의 생활양식을 관리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 기 위해서는 정보수집 능력 , 센스와 안목 등도 중요해진다. 단순히 생활비의 집행 뿐 아니라 전반적인 가족 재산의 관리도 주부의 역할이다.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시키는 데 있어서 주부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주부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그 자신도 고학력자인 이 주부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기대치 는 매우 높다. 딸을 4년제 대학에 보내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문화 권은 '강남 문화권' 밖에 없을 듯하고, 실제로 이 공간에서 여자 대학생들의 대부분을 생산해낸다. 친척 등이나 지역사회 공간에서 관계를 유지 시켜 나가는 데에도 주부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주부의 권력과 통제력은 확장된 것 같다. 이제 주부의 일이 단순한 가사노동이 아니 라 고도의 정신 노동을 동원하여 구상, 실행, 운영되어야 하는 역할이 된 것이다. 전 업 주부로서의 지위는 긍정되며 자긍심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간호사라든가 비서보다 는 '사모님'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높이 인정하게 되고 -비록 남편의 지위에 근거하 는 것이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가정 역할에 대해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제까지 여성학계에서,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하여, 가내 노동은 그 노동 자 체에서 여성을 소외시키고, 가족 관계에서나,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여성을 소외시킨다 는 것이 지적되어 왔는데, 이러한 '강남 문화권'에서는 여성의 역할과 통제권이, 여성 스스로 다른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성취감과 자아 실현감을 느끼게 하고, 여성의 통 제권이나 권력이 가족 내에서 확실히 인정되고 자리매김 된다는 데에서, 이러한 교양 있고 세련된 신현모양처 주부의 상은 '모범적인 것'으로 위치 지워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