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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끝, 혹은 오래된 시작(11)   밥솥에 쌀을 담고 물 양을 재려고 손을 담갔다. 대충 눈대중으로 물을 부은 거였는데도, 마치 손에 금을 그어놓은 듯, 그녀가 이 정도면 적당하리라고 마음먹었던 곳하고 물의 높이하고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행여 눈물이라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가도 그 황금 분할이 깨어질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엄마가 그녀의 손에 그어놓은 수많은 선들 중의 하나였다. 완전히 잊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묻어있는 것들은 너무 동네 총각에게 강간당한 한 처녀가 자살했을 우물처럼, 깊고 진했다. 밥을 앉히고 그녀는 콩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정확히 두께가 얇아지기 시작하는 그 부위에 엄지손톱을 갖다대어 단번에 부러뜨리는 요령 또한 손에 남아있다는 것도 이제는 이상할 것도 없게 느껴졌다. 콩나물 무침에 깨를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지, 기름은 어느 정도, 고춧가루는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지 등등을 그녀는 너무나 잘 끄집어냈다. 찌개도 하나 끓여야 하겠지...뚝배기 비슷한 거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찬장을 여니 그 안에는 신혼 혼숫감으로나 알맞을 만한 아기자기한 뚝배기들이 줄을 지어 엎어져 있었다. 정말로 그녀 친구의 부엌은 물기 빼고는 없는 것이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폭삭 내려앉아 보이는, 한참동안의 건기를 거친 년으로 하나 골라 물을 받았다. 물을 받으며 그녀는 자신의 손에도 물기를 묻혔다. 밥짓는 냄새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는 그래도 일어날 기척을 안 했다. 그녀는 밥통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 잇던 열기들이 하얗게 머리를 풀고 날아들었다. 그 열기는 미용실의 헤어 드라이어 열기와도, 벽을 타고 올라가던 숨소리 속의 열기와도 닮아 있었지만, 전혀 비릿하지 않았다. 밥알들이 소골소골 얽혀있는 속을 헤집어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친구의 사기 밥그릇이 유리 탁자 위에 놓이는 소리가 친구를 깨운 모양이었다. 눈을 반쯤 뜬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된장찌개가 탁자를 쳤고, 콩나물, 오징어 조림들도 차례로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탁자에 박수를 쳤다. 그녀가 문득 눈을 들었을 때 친구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밤에 본 눈물이 친구 얼굴을 수놓은 뱀들의 유희에 놀아났던 것과는 달리 이번 물방울들은 아무 것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곧장 볼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왠지 이 식사는 그녀와 친구 모두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밥이 될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