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끝, 혹은 오래된 시작(10)

 

미용실 문을 열자 소음과 냄새 그리고 열기가 진을 치고 있다가 덤비는 듯 했다. "어머, 언니 오랜만이에요." 임언니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가위들이 쩔그렁거리는 앞치마를 흔들며 달려왔다. 임언니는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커피한 잔을 뽑아주고는 또다시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향해 사라졌다. 이곳은 마치 거울이 지배하는 세상 같다고 그녀는 또 생각한다. 그러나 자괴의 시선을 만나는 거울이 아니라 꿈꾸는 시선을 만나는 거울들의 천지이다. 그 꿈들이 거짓말쟁이가 되자는 꿈이라고 비웃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다. 어쨌든 그녀들은 이곳에서 수십 개의 알록달록한 판때기를 붙이고, 수백 번의 가위질에 머리카락을 내맡기고, 꿈을 꾸는 것이다. 잠시 후 임언니가 다가와 의자 밑의 페달을 밟자 의자는 위로 쑤욱 솟아올랐다. 머리에 물을 뿌리며 '언니'는 요즘 부쩍 머릿결이 좋아졌다는 둥 쉴새없이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해대고 있었다. 미용사의 편의에 맞도록 철저히 기능화된 의자에 앉아 있으니, 치과 생각이 났다. 치과의 의자 또한 의사의 페달질 몇 번에 접혔다, 펴졌다,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 의자 옆에 주렁주렁 달린 선반들도 의사의 손짓에 왔다갔다하도록 되어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도로, 그래서 잔인하리 만치 기능화되어있는 의자는 미용실에 있는 것도, 치과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산부인과에 있다. 그런 의자에 앉아서, 아니 누워서... 산부인과에서도 꿈을 꿀 수 있을까. 아랫도리에 냉기를 느끼면서 바라보았던 산부인과 천장무늬가 또다시 머리 속에 떠올랐다. 너무도 단순해서 무늬라고도 할 수도 없었던 병원 천장, 페달 한 번에 좌르륵 펼쳐지던 다리, 페달 한 번에 부웅 위로 솟아 임언니가 손질하기에 딱 적합한 높이가 되는 미용실 의자, 손만 뻗치면 닿게 되어있는 수많은 가위들, 날카로운 것들... "파마 한 번 하셔야죠?" ,
"임신입니다."
"두 시간밖에 안 걸려요." 그리고 음모의 냄새.
역적모의를 하는 집단 같다.
두 날개를 핀으로 꽂힌 새처럼 그녀는 있었다. 그리고 임언니는 이제 파마 약을 개어서 갖가지 판때기들과 함께 머리에 바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친구는 냉장고 앞에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바짝 바짝 말라버린 과자 부스러기가 친구 주위에 아무렇게나 널벼져 있었고, 친구 입가에도 몇 개 붙어 있었다. 두 다리를 거의 가슴팍에 닿게 올리고 손을 맞잡고 잠들어있는 친구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주루룩 흘러내릴 것 같아 보였다. 눈가의 주름으로 보아 배고픈 채 잠들었던 게 분명했고, 과자 널부러기들도 최근에 뜯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배가 고프면 저런 자세로 웅그리고 잠드는 건 아마 친구의 아주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습관이리라. 밥을 지어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명확하게 '밥짓다'라는 어구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항상 그녀는 '뭔가 먹어야 겠다.' 라는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녀는 그저 '뭔가'를 '먹었'었다. 밥을 짓는다는 건 줄곧 그녀에게 있어 하마터면 그 밥짓는 행위가 그녀 전 인생을 먹어 버릴 지도 모르는 무서운 행위였었다. 평생 남의 밥만 지었던 그녀 어머니의 축축한 손을 잊지 못했던 것도 그 이유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등을 돌려 나와 동네 어귀에서 항상 메마르게 지나치기만 했던 슈퍼로 향했다. 크기는 전혀 '슈퍼'하지 않은 동네 슈퍼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한껸에서 썩어가고 있는 각종 야채들의 냄새가 오래된 각종 잡화들을 묵묵한 냄새와 섞여왔다. 이런 슈퍼에 들어와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어느새 나물이 놓여있는 곳으로 와서 싱싱한 나물을 손끝으로 척척 구별해 봉투에 담고 있었다. 어릴 적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서 했듯이 그녀는 손끝에 느껴지는 상추의 질감, 두께 등으로 단박에 그것이 싱싱한 년인지 아닌지를 알아내었고, 이것은 콩나물, 부추 등 다른 나물류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릴 때 가보았던 온갖 '슈퍼'들의 특징을, 그렇게 오랫동안 지우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생생히 마치 손톱에 낀 가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제일 구석부분에 있는 각종 야채류, 냉장고 구석에 박혀 있는 것일수록 으레 더 신선하게 마련인 유제품과 나물류, 언제나 좁은 통로, 쌓여있는 과자들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코트 자락을 앞으로 모아 움켜쥐고 걷는 것까지...

친구는 아직도 전화 수화기 선처럼 동그랗게 말려 자고 있었다. 그녀는 물기가 하나도 묻어있지 않은 바가지에 쌀을 담아서, 역시 물기가 하나도 없는 개수대에 넣고 물을 틀었다. 친구의 싱크대에는 부드러운 수세미, 철수세미, 세제, 온갖 종류의 사기 식기들, 개수구 냄새 제거제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단 하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기'였다. 그녀는 수도를 힘차게 틀어 쌀에 물을 받고, 싱크대에 물기를 묻혔다. 그리곤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도통 물에 담근 적이 없었던 손을 그 안에 담가 쌀을 씻었다. 바가지의 촘촘한 결에 쌀알들이 부딪혀 떨어지며 나는 소리가 마치 장마철의 시원한 빗소리같이 들렸다. 허연 뜨물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개수구안으로 밀려들어가고 또 밀려들어갔다. 자신의 손안에서 허옇고 축축하게 일어나는 것이 정액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잠시 실감했다. 그리고 쌀알들을 한 참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이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았다. 스무 해가 넘게 살면서 삶이 가르쳐 준 것은 신경성 두통과 까맣게 눈동자를 비우는 법뿐이라고 해왔던 그녀에게 이상하게 선명한 소리를 내는 쌀알들은 그 동안 그녀 눈을 싸고 있던 흑태마저도 허옇게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눈동자를 까맣게 비워버리고 아무 것도 담지 않는 것, 그리고 그저 눈동자에 잠깐 씩 담겼다 사라지는 영상들을 양칫물처럼 게워내는 것, 그 법칙을 고수하던 그녀에게 그러나 요 근래 그녀의 눈동자 언저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영상들이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사각형들, 두발, 두 손을 모으고 잠을 자는 친구의 모습 그리고 꿈속에서 보았던 눈썹뭉치, 매일 아침 그녀가 그렇게 집요하게 쳐내던 눈썹들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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