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글램록과 그 스타일이 가졌던 긍정적인 가능성은 촛점을 팬―소 비 대중이 보여주는 생활의 방식으로 돌릴 때 나타납니다. 대중 안에 역사 또 한 존재하는 것이니까.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공연에 모여드는 관중들의 모습 은 브라이언 만큼이나 인상적입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그의 아이콘, 패션인 메 이크업과 의상, 장신구로 감싼 그들의 몸은 실제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흐 리게 합니다. 많은 여성 팬 사이에 끼어든 남자는 스타일에 있어 소녀들과 다 를 바가 없지요. 실제로 팬의 대표격으로 나온 또 하나의 주인공 아서 스튜어 트는 바로 이러한 글램 코드와 이미지에 힘입어 이성애적 편견에 의한 자기 검열, 가족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한 문화 안 에서 향유하고자 독립해 나갑니다. 소녀들, 그리고 '소녀적 취향과 정체성'을 선택하고 싶은 소년들을 위한 문화의 자리가 글램 록의 인기와 더불어 조금씩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혁명의 시작이지요. 우리들이 바라는 혁명 의 시작.
    "글램록은 게이 문화에서 
    여성성이 근사한 것으로 통했던 마지막 순간이다."
    (토드 헤인즈 : 씨네 21, 125호. 김혜리씨와의 인터뷰 중)
    
    미덥지 않다면, 글램록의 전성기와 영화 속의 1980년대를 비교해 봅시다. 각종 공영 기관의 후원 하에 특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며 공연 마다 공공연히 전세계 "30억" 시청자를 운운하는 한심한 기성 팝가수 토니 스 톤과 암살쇼를 벌이면서 사라진 브라이언 슬레이드 사이에 크나큰 간격은 없 습니다. '거짓으로 점철된' 존재. 대중을 우롱, 현혹하는 거짓된 속성은 같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들과 팬과의 관계 속에서 지어진 문화의 장은 엄청난 차이가 있 습니다. 80년대의 팬들의 팝 문화 향유 양태는 마치 찌든 일상의 연속인 듯 보여집니다. 쥐꼬리만큼의 여가 시간 때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죠. 그러 면서도 스타는 일상은 물론, 기존의 거시적 사회 구조를 지지하는 발언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백인, 미국인 우월성 천명, 공화당 정책지지. 이러한 이데올로기 효과는 어차피 어디에나 산재한 것이니까, 스타도 그에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죠. 유희에 대한 직무 유기라고나 할까. 스타는 점점 멀어지고, 동 시에 팬들은 발랄함을 잃고 찌들었습니다. (이들이 우리 거리의 아저씨, 아줌 마, 그 후보생들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스타의 환영은 기회주의적으로 적 당한 선에서 일상에 불려들어지고 무시되고 합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슬레이드의 팬들을 봅시다. 90년대 한국의 우리들이 보 기에 정말 골 때리는 패션 스타일리스트들이죠. 거기에 소년과 소녀가 구분됩 니까? (아니 소년이 있었나? 하시는 분들. 반짝이 화장에 통굽 힐을 신은 소 녀들 사이 사이 청일점처럼 엇비슷한 용모의 소년들이 배치되었지요. 마치 모 토바이크족 청춘물에 나오는 모든 행동을 과장하는 홍일점 가죽 쟈켓 빽바지 톰보이 소녀와 같이. 하지만 여기에 성희롱은 없습니다. 소녀들은 지극히 자연 스레 소년들을 받아들이죠. 배제하지 않고 노는 법에 있어서는 소녀들이 더 도통한 모양이죠.) 그리고 방송 인터뷰에서 길거리 젊은이들은 양성애적 취향 에 대해 공공연히 떠들어댑니다. 심지어 커트는 진짜 게이 나와봐. 뭐 유행이 랍시고. 거짓 게이가 판을 친다는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지금은 거리에서 싸우고 있지만, 1972년 그때는 춤 같은 것이었지요." 
    (맨디의 동성애에 관한 논평)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글램 록의 유토피아. 진저리나게 처지는 일 상에 대한 무기였습니다. 그것이 거짓이고, 쇼라지만 젊은이들은 길거리에서 자신을 확실히 증명하고(그들을 비난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의 불안을 보셔요) 쇼는 점차 즐거움이 도수가 올라가면서 다른 서사/신화를 만들어 갔습니다.(소 녀들의 바비인형 놀이가 그 예죠.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브라이언과 커트) 글램록의 허무주의와 유미주의에 그 자체로 정치학과 윤리를 비웃는 속성이 존재했고, 브라이언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할만한 '가공할' 가벼움을 대중 매체, 산업을 통해 끌어 모은 결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스타일의 가벼움. 매체―산업의 제도 옹호적 원리. 이에 대한 저항적 속성 사이에 그어지는 복잡한 관계망의 단단히 꼬인 매듭에 묶인 (자기가 줄을 엮기 시작했으니, 자기를 정점으로 모일 수 밖에) 브라이언은 그 야말로 벗어날 길을 잃습니다.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커 커트 코베인의 사례 (신화?)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문제이긴 하죠. (하긴 이론가들도 글로는 허세 를 부려보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꼬임을 풀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입 장이죠.)
    브라이언과 글램 록은 실패였다고 칩시다. 그럼, 이에 대한 브라이언과 글 램 록을 바라보는 <벨벳 골드마인>의 해결책은 어떤 것이었을 까요? 역시 스 타일 탐색기답게 섣부른 판단이나 선언에 대한 집착은 없습니다. 좀 더 설명 해 볼까요?
    영화는 처음부터 역사와 진실에 대한 거리 두기를 해두고 허구 파티를 시 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현실, 과거 유물, 진실, 시간의 굴레를 벗어 던 지고 허구가 임의로 조합해 놓은 순간들의 거리낌없는 탐색.
    관객에게도 "거리낌없기"를 기대하며, 준비시키죠.
    "당신이 보게 될 것이 허구라 해도, 최고의 볼륨으로 즐겨야 합니다." 
    "Although what you are about to see is fiction, 
    is should nevertheless be played at maximum volume."
    
    또한 영화는 네러티브에 있어서도 일정한 관점, 일정한 시간의 결을 따라 (그런데, 영화에 있어서 일정한 시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학보다 복잡한 차원으로 시점 다중화가 불가피하지요. ― 또 나중에 . . 란 말을 남기는 게으 른 글쓴이) 진행되는 순차적 이야기 구조보다는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이질적 인 시점과 시간의 조합을 취하고, 심지어 음악 특유의 연결 원리로 기존의 영 화적 구성을 변형시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Baby's on Fire'노래와 함께 나오는 뮤직 비디오 클립(!)은 음악의 동기 변화에 따라 브라이언과 커트의 공 연기/아서의 각성기(자위 행위와 가출)/무대 뒤 혼음 파티/가 시간의 순차성에 구애받지 않고 진행, 반복됩니다. (악! 너무 복잡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하 시는 분은 비디오가 나오면 유심히 보셔요. 이 영화에는 얼핏 봐도 온전한 뮤 직 비디오 클립이 서너 개는 발견되니까. 녹화해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The Ballad of Maxwell Demon'(브라이언과 비쥬 뮤직 디바인씨와의 만 남에서) 'Ladytron'(맨디와의 만남) 'Satellite Of Love'(브라이언과 커트의 연 애) 'Tumbling Down'(외계로 떠나는 글램록) 등등. 조성모(-.-)의 영화 같은 뮤직 비디오보다 휠씬 음악에 충실한 뮤직 비디오 모음이죠 게 중 'Baby's on Fire' 무삭제 판이 제가 볼 때는 최고입니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90년대 영화는 70년대 초와 80년대 중반이란 시간을 뚝 띄어다 맘대로 '자유롭게' 짜깁기 놀이를 해 보죠. <벨벳 골드마인>은 브 라이언의 글램 가면 게임의 영화판이라고 할까. 영화에 몇 가지 종류의 가면 과 게임 옵션이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도 시간 떼우기로 환상적일 겁니다. (추천) 그리고 동시에 이 놀이가 더 큰 사고 유희를 가능케 하고 있음을 보시 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바쁘고 귀찮다고요? 그럼 휘황 찬란한 허구들의 집 성체를 그저 입 딱 벌리고 구경하는 재미만으로도 흡족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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