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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좋아하세요]







원했던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잠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우리 아버지는 매우 바쁜 사람이었다. 물론 당시에 "바쁜 남자"라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은 아버지가 아주 적절한 남편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우 바 쁘다"는 것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친구들 아 버지가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는 날(예를 들어 추석이라든지 설이라 든지, 그 외에 빨간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 날)이면 반드시 우리 아버지 는 비상 근무로 집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최고로 바쁠 때는 석 달 동안 집에 들어올 수 없는 날도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집안에서 어떤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 다가 아버지는 장남이어서 어머니는 시부모를 비롯 시동생 둘을 데리고 있 어야 했고, 심지어 아버지의 직업 상 이곳 저곳 지방으로 이사를 많이 다 녀야 했기 때문에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동안에만도 우리 집은 이사를 4번 이나 해야 했다. "당연히도" 어머니 혼자 이사짐을 다 싸야 했고, 아이들을 챙겨야 했으며, 비가 심하게 와서 연탄이 젖거나 기계가 고장이 나면 어머 니 혼자 수리를 하거나 옮겨야 했다.

만일 우리 어머니가 결혼을 하기 전에 자기 자신 및 주변 사람으로부터 엘리트로서의 기대를 덜 받았더라면, 이런 일들이 조금은 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혹은 만일 어머니가 그런 젊은 시절의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결혼 후의 자신을 완전히 단절시킬 수만 있었다면, 차라리 결혼 후의 삶은 좀 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엘리트로서의 자존심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해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폭군같은 남편은 자존심을 짓밟는 존재였고, 비합리적인 시부모는 고립감을 더욱더 강화시 키기만 했다. 어머니보다 이른바 "공부를 잘 하지 못했던" 친구들이 "결혼 을 안 하거나 혹은 잘 하는 바람에" 유학을 가고 교수나 전문가가 되었다 는 사실은 그녀에게 슬픈 상처가 되었다. 어머니는 이런 모든 불행을 "남 편을 잘못 선택한 스스로의 무능함" 탓으로 돌렸다.

어머니의 후회와 절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에게로 전가되었다. "좋 지 못한 이야기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어머니는 남편과 시부 모로 인한 고통을 어린 내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여섯 살때부터 들 은 그런 이야기들이 처음에는 "불쌍한 우리 엄마"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했 을지 모르지만, 국민학교 6학년이 될 즈음에는 이미 지겹게 느껴졌다. 더우 기 어머니의 그러한 슬픔과 한탄은 내가 "착하고 공부 잘 하는 아이"가 되 어서 어머니에게 하나의 "보상"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심어 주었 다. 이것은 무서운 경고였는데, 만일 내가 착하고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안 된다면 "이미 충분히 불행한" 어머니의 가슴에 "되돌이킬 수 없는" 못을 박는 것이라는 날카로운 메세지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교육 방식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내겐 매우 가혹했 다. 국민학교 때 하교 길에 갑자기 비가 오면, 어머니들이 하나 둘 우산을 가지고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지만, 그 안에 우리 어머니는 없었다. 내가 비를 흠뻑 맞으며 집에 오면, 어머니는 "비 한 번 맞는다고 죽지 않아"라 고 말씀하셨다. 내가 친구와 싸우고 친구의 어머니가 나와서 편을 들어 줄 때마다, 우리 어머니는 오히려 친구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나보고도 사과를 하라고 시켰다. 내가 아무리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도 어머니의 답변은 항상 같았다. "네가 잘못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어도 일단 싸움을 했으면 너도 잘못한 거야. 그리고 친구와 싸웠을 때 는 반드시 먼저 사과를 하도록 해".

공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공부를 잘 한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가끔 신문에서 어머니들이 자식 교육을 위해 영어나 수학 학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접하면, 나는 문득 내 고등학교 시절의 어머니가 떠오 른다. 어머니는 어떠한 학원에도 다니지 않았지만, 내가 고3일 때조차도 날 가르칠 수가 있었다. 특히 어머니가 고등학교 독어 선생님을 했다는 것 때 문에 난 독어 공부를 다른 과목보다 더 주의깊게 해야만 했는데, 어머니에 게 독어 시험은 너무나 쉬운 것이어서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틀린 시험지 를 보여주는 것이 몹시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반에서 1등을 한 적 도 있고 전교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지만, 단 한 번도 어머니의 "흡족한 모 습"을 본 적이 없었다. 도리어 어머니는 언제나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다"고 꾸지람을 하셨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최선"이란 마치 노예의 쇠고랑처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풀리지 않는 일종의 낙인이었다.

내게 있어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과 다툴 때면 반드시 편 이 되어 주고, 공부를 잘 하면 떠들석하게 자랑스러워하고, 착한 일을 하거 나 성적이 오르면 선물을 사 주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푸근함" 이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나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고, 내가 공부를 잘 해도 언제나 더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아이들이 무 엇을 잘했다고 해서 금전적인 보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었다. 항상 나는 "푸근함"을 그리워했다. 대학에 들어와도 별로 다르지 않 았다. 친구 어머니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딸을 공주처럼 꾸미고, 성형 수 술을 시키고, 에어로빅 학원이나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을 시켰지만, 어머니 는 "자기 스스로 떳떳한 사람들은 그런 치장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고 일축했다. 물론 내가 성형수술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위 아이 들에 비해 겉모양이 너무나 초라하다고 느낀 적은 꽤 많았다. 하지만 어머 니의 입장이 어떤 줄 알고 있었던 나는 어머니로부터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르기 보다는 스스로를 "검소한 아이"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더 쉬웠다.

자라면서 나는 변해갔다. 김유정 소설 『봄봄』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 럼,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대체 언제 "만족"에 도달하게 될 지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어느 순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조금씩 도망치 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더이상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착한 딸이 아니었다. 어머니에 게 말하지 않는 것이 하나 둘 늘어났고, 어머니가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되 는 것들은 허락없이 혼자서 몰래 했다. 어머니에게는 겉으로 보여지는 성 적표와 가져가는 용돈의 변화가 없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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