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 동지들에게 1 *

 

1. 그녀가 남성들과 보편적 의미에 동참하려 달려들었을 때 그녀는 무엇 을 손에 쥐고 갔었는가? 바로 20년간 배운 여성의 미소였다. 그녀가 의 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그것은 이미 그녀의 천성이자 본능이었다. 부드럽 게 웃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이해심있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감싸주고 명랑하고 흥겹게 기분을 맞춰주는 것. 그녀는 그것을 인간의 이 름으로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째, 남성은 그 모두가 여성의 그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환영했다. 남성들이 그것을 인간적으로 받아들 이고자 노력할 때도 남성들의 모든 세포는 먼저 여성의 그것들에 반응했 던 것이며, 남녀가 동등해야 한다는 의식보다 세발짝은 앞서서 달콤함부 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녀가 최선을 다해 공명정대하려고 노 력했다 해도 그녀의 의식 아래서 그녀의 행동과 미소는 벌써 여성의 그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미소, 그런 부드 러움, 그런 친절함들, 바로 남성이 달콤해하는 것들을 내놓았다는 것, 그 것만으로만 남성의 세계와 보편적 의미에 참석할 입장권이 교부될 수 있 었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깨 닫는다. 자신은 한발자욱도 여성의 운명과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여성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어설프게 굴레에 도전한 대가로, 여성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2.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까지 추락하기에는 결정적인 요소가 한가지 더 남아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녀의 함정은 그렇게 깊지 않았을 수도 있 다. 그것은 그녀의 육체이며 섹스이며 사랑이다. 그녀는 남성의 세계에서 인간의 이름으로 참여함으로써 사랑 또한 인간의 이름으로 수행하려 한 다. 정직한 감정, 대등한 주체로서의 만남,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성실함, 결코 억눌리지 않는 정열의 발산. 이것들이 그녀가 생각하 는 사랑이다. 그녀는 순결에 대한 결벽증, 처녀막의 신화란 그저 관습적 이고 봉건적인 의식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러한 관습과 신화는 기껏해야 섹스에 처음 임하는 여성의 낯설음과 육체 적 공포가 과정된 것에 불과하다. 왜 아니겠는가? 단순한 합리성에 의하 면 그러한 신화들이란 웃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여성에게 족 쇄지어진 사회적 정조대를 걷어차 버린다. 그러나 그 정조대를 걷어 차버 렸을 때 도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회의 폭력적 응징이 무엇인지를 그녀는 모르고 있었을 따름이다.

3. 그녀는 합리적으로 인간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남성과 여성에게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남성과 사랑 을 하는 것은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가능성이며 인간의 정열이라고 믿으려 한다. 그러나 사 랑을 시작하는 그 순간에 남성이 무어라고 맹세를 하건, 그 맹세가 그 순간만은 남성의 진심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동일하지 않다. 남성도 노력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최선을 다하는 때조차도 그의 정열은 여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욕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 욕망은 아주 놀라울 만치 단순하면서도 그것 이상으로 강렬해서, 남성의 사고를 바닥부터 속 이고도 남는다. 남성은 자기의식과 자기언어의 진실을 스스로 알 수가 없다. 그가 최선을 다해 여성과 대등하려고 노력해도 그의 정열은 단순 하고 직접적인 성욕에 고착되어 있다. 여성은 그렇지가 않다. 여성의 사 랑은 사랑하는 그 순간에 인생의 가장 커다란 의미를 투사한다. 합리적 이기로 결심한 그녀는 한 남자의 품안에 모든 걸 내맡기는 그런 사랑을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그녀에게 사랑은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다. 거기서부터 틀렸다. 그녀의 중요성은 남성의 중요성과 비교 도 안된다. 그 중요성이 동일하다고 믿거나 착각하는 것 뿐이다.

4. 생각해 보라. 그녀가 남성의 세계, 보편적 의미의 세계에 일원이 되 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남성은 남성이기 때문에 증명되었 다. 여성은? 함께 일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그녀의 증명이 되지 못 한다. 그녀는 강렬한 결속을 희망한다. 그녀의 사랑은 이 부조리한 조건 과 희망에 의해 이미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그녀가 부정해도 그녀의 본능이 이미 알고 있다. 굴복한 여성들은 남편이 될 남성을 자기에게 확 실히 묶어 두려한다. 혁명적인 여성은, 남성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애초부터 포기한다. 합리적인 그녀만이 가운데에 서 있다.

5. 합리적인 그녀는 이렇게 해서 사랑과 섹스로 온 육신과 정신이 얼룩진 다. 막이 내린 후 그녀가 절대적인 진공 속에 홀로 남게 되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육체 와 정신을 근본적인 물적 조건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떠나 고, 자신은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넘어서려 함으로써 철저히 여성으 로 남았고,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이 여성이 누구인가? 아내도 아니고, 투사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고, 인생을 즐기는 유한마담도 아닌 여자.

6. 그러나 진정 혁명적인 여성은 남성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 로 포기할 수 없으며 포기해서도 안된다. 첫째로 남성, 여성이란 이미 사 회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온 것임을, 생물학적인 본질이 아님을 알고 있 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여성이 바라는 사회의 모습이 전설적인 ' 아마조네스'처럼 남성을 배제하는 공간이 아님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 다. 갖가지의 더러움과 슬픔으로 얼룩진 여성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인지한 후에야 비로소 타협이 아닌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7. 그렇다면 싸움의 대상은 무엇이고,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가. 일차 적으로 싸움의 대상은 함께 변혁을 논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향해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변혁을 논하지 않는 남성들의 작태에 대해서 혁명 적인 여성들은 구태어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강고한 철벽같은 남성 세 계를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여성들은, 대학교 초년생이 가질 만한 남성 전반에 대한 희망이란 이미 제거해 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 러한 남성 세계의 일반적 폭력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자들은 오히려 남성 들, 이른바 변혁을 고민하고 있는 남성들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께 활동하는 여성들의 답답함이 놓여 있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고민이란, 그들의 분노란 이처럼 단지 표면적인 폭력에 한정되고 머무르고 있다는 것.

8. 자기의 삶을 걸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성들은 진정 여성과의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또한 남성들은 여성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남성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숱하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생각해보 라. 남성들이 그들의 상대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이 세계의 주인임을 인정한다는 말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구태어 주인 이 노예들에 대해, 그들의 고민과 생활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는가. 주 인은 노예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만 알고 있으면 충분한 것 이다.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알려고 하고 고민할 때가 있다면 그건 그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 관계를 진전시키고자 할 때 뿐인데, 그때라 하더 라도 그들의 앎의 방식이란 어떠한 체계도 논리도 근거도 없는 무성한 소 문과 뒷얘기들을 통해서이다. "여자들은 이러이러 하다니까~"식의. 남성 들은 결코 여성을 '여성 전체'로서 고민하지 않는다. 남성들에게는 각각 의 특수한 누구누구로서의 여성이 있으면 있었지 '여성 전체'란 없었고, 따라서 그들에 대해 결코 고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활동할 수 있는 지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이 남성들 전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동안, 남성들은 이미 안전 장치가 되어 있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삶의 기쁨을 조금 더 가미하기 위해 만날 수 있는 여자들만을 추려내고 있으 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여성 전체에 대해 고민해 보지 못한 그들에게 여성이 집단적으로 등장하면,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녀들을 어떻 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남성들은 단지 여성들을 최소한 기분나쁘게 해 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예의를 차리는 것 외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9. 남성들의 고충을 이해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들이 이제 냉 정하게 고백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단지 여성들을 '활동할 수 있는 존재'로만 인정해 왔을 뿐이지, '여성운동이 자신의 운동'이며, '활 동의 내용을 같이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점이다. '활동할 수 있는 존재'로 여성이 선 것은, 남성들의, 이른바 변혁적인 남성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자신들의 진 보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늦은 귀가의 고충을 이해해 주는 것, 생리 및 임신 시의 휴가를 보장해 주는 것 등은 이 역시도 얻어내기 참으로 어려 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여성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지표 가 될 수는 없다. 진정 여성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을 긍정하고, 또한 여 성들이 아직까지 그네들의 특수성에 의해 똑같은 인간으로서 사고해 버 릴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남성들은 이제 '여성'을 알아야만 하고 함께 고민해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성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더러운 '남성중심주의'의 한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변혁' 운 운하는 것이 결국 세상의 절반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음을 개탄하 게 될 것이다. 동시에 열정적으로 함께 하고자 했던 여성 동지들을 냉소 와 자조와 정신 분열로 빠지게 하는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이 글은 1-5까지는 김상태, '섹스라는 기호를 다루는 사람들'에서 발췌 했으며, 6-9는 필자가 쓴 것임을 밝힌다.)

서린

* 남성 동지들에게 2 *

 

성호씨와 경두씨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그 것에 대해 먼저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성호씨의 글 중, "성문제는 제아무리 잘난 조직에 있어서도 개인과 사 회라는 구도 속에서 스스로 감당해야 함으로 등장한다."는 것에 대해 동 의합니다. 한편 경두씨의 글 중 "조직내의 성차에 따른 분업은 없는 것 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역시 동의합니다. 동시에 저의 글이 어쨌든 '조직 내의 남성/여성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고 보신 것에 대해 서는 정확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두 분은 제가 글을 쓴 의도를 보 다 확대해서 생각하신 듯합니다. 아마도 제가 논쟁의 지점을 명확히 드러 내지 않은 채 개인적인 단상들을 마구 나열했기 때문이겠죠. 사실 논쟁을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몇 가지 설명은 더 해야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어 차피 이야기는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앞서 글에서 저는 무 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1. 먼저 여기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는 것. 우리가 '바람직하다'라고 가지고 있는 상과 실제 현실에서 가능 한 상 사이의 괴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봅시다. 구태의연한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른바 부르주아지는 그 런 얘기를 했다 합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그들은 신분제적 관계 를 철폐하는 데 앞장선 당시로선 무척이나 진보적인 애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기치를 걸고 시작된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결코 "평등하 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내기들이 갓 들어와 "자본주의 사회 란 결국 자기가 노력한 만큼 얻어가는 평등한 것이 아니예요?" 하면, " 현실을 봐,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단다. 평등이라는 말은 허울좋은 이 야기일 뿐이지. 과연 지금의 사회가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조건 들을 갖추고 있을까? 그런 조건들을 마련하기 전에 진정한 평등이란 이루 어질 수 없는 것이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겠습 니다. 통과연에서 성세미나를 하던 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친구 가 있는데 그 아이는 자기가 유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서, 여자는 집안일을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가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평 화로운(?) 가정을 꾸리고 싶대요.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해요. 하지만 자기는 반드시 그런 남자를 만 나서 살고 싶고, 그리 흔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남자하고만 결혼할 거래요.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니까 뭐라 할 수 없고, 자기가 좋 다 하고 남편될 사람도 좋다 한다면 누구를 억압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 지요." 이러한 것을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단지 '선택'의 문제 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이렇게 얘기를 하곤 하죠. "누구나 자율적인 선택이 가능하고, 그것들이 어떤 외부적 억압없이 공존 할 수 있는 사회라면, 구태어 그러한 것들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분명 이 사회는 성억압적 기제가 공공연한 외부 권력으로서 자리 잡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의 의견은 단지 선택의 문제라고 단순 화될 수는 없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둘만 어디 무인도에 가서 살 것도 아닌데 서로 간의 억압이 없으면 만사 끝장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 겠느냐는 문제를 제쳐놓고서라도 말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 은 거냐구요? 성호씨의 말 중 "난 개인적으로 여성/남성이란 구분선을 따 라 주위 동료들을 이해하지 않는다. 누구, 누구로 이해한다. 여성에게 진 정 관심이 없었다면 남성들에게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문장에 대한 저 의 입장을 비유적으로 표현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개인 대 개 인으로 만납니다. 어쩔땐 집단 대 개인으로 만나기도 하고 집단 대 집단 으로 만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을 논의하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진정 여자든 남자든 누구나 전부 구체적인 개개인으로서 관계맺 는 것이 서로 자유롭게 가능한 사회라면 구태어 '여성운동'이라는--이른 바 환경, 정보, 노동같은 비생물적 영역과 나란히 쓰이는--괴상망측한 운동 분야가 나타나지도 않았겠지요. 여성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 남성 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로 정당화가 되고 있는데, 그것이야말 로 이른바 회사 사장이 여직원들에게 임신 휴가를 주지 않겠다고 하면 서 그 근거로 "나는 남자 사원과 여자 사원에 대해 평등하게 대할 뿐." 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미 여성/남성의 층위 적 현실을 초월한 채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가 다시금 인정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이 성적 불평등 이 만연해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여자들 중 거의 대부분이 남자들 처럼 자신을 '주체'라 여기고 살지 못하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2. 따라서 성호씨의 글 중 "성문제는 ...... 스스로 감당해야 함으로 등 장한다."라는 부분에서 동의할 수 있는 근거는 다른 부분이 아니라 '등 장한다'라는 서술어에 놓여 있음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즉 성문제가 분명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문제로 등장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만, 결코 언제 어느 곳에서나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미리 규정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 감당하는 문제로 해결 가능했다 면 이른바 여성들의 모임체란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지요. 그 들이 모였던 것은 이른바 성문제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서이기 때문이니까요. 이것이 개개인의 사적 생활을 통제하고 규범화해 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님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혹시 성호 씨가 성문제를 '연애'에 한정시켜 생각했던 것인가 하는 추측때문인데, '성문제'는 연애에 있어서 가장 치열하게 나타날 지는 몰라도,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여자에게도 항상 따라 다니는 너무도 '사회적'인 문제 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성의 해방을 고민하는 조직체라면 이 문제가 결코 개개인이 감당하기만을 기다려야 하 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 다른 한편 경두씨의 질문을 받아 안아 생각해본다면, 제가 제기한 문 제가 과연 '조직 내 성별 민주주의'에 관한 것일까요? 솔직히 경두씨가 생각하는 '성별 민주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 다는 것이 저의 곤혹스러움입니다. 일단 조직 내의 모든 구성에 있어 남 성과 여성의 수를 똑같게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닐테고, 항상 모든 문제 가 남성과 여성의 입장에서 나누어 논의된 후 합쳐져야 된다는 것 역시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요? 이것이 과연 '성별 민주주의' 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문제를 이야기해 보지 요. 또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 볼까요. 국민학교는 거의 전부가 남녀공학 입니다. 지금은 어떨른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제가 국민학교(지금은 초 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죠)를 다닐 때만 해도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은 참 으로 많이 달랐습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경우가 반장 선거였 죠. 반장 선거를 하면 후보의 거의 전부가 남자애들이었고, 간혹 여자아 이가 하나 정도 끼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뭉뚱그려 이야기하자면, 남 자애들은 유치한 수준에서나마 연설도 잘하고 반 아이들 전체에 대한 통솔력이나 다른 반과의 관계에 있어 훨씬 더 능숙했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애들은 일찍부터 '사회성'의 훈련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여자애들 은 어려서부터 인형이나 소꿉놀이를 하며 한 둘 친한 여자 친구와만 교제 를 했기 때문인지, 마음 속에 무한한 '자기 만의 방'을 가졌을른지는 몰 라도 '사회성'의 부분에 있어서는 남자애들을 따라잡기가 그리 쉽지 않 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반에서 여자애들의 무더기 표몰이로 여자 반장이 탄생했다고 해 봅시다.(이런 경우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떤 일 이 발생할까요? 그 여자 애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부인하 지 않는 한(이른바 아주 남성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한), 반 내부의 일을 꾸리든, 다른 반과 같이 만나든 간에 허구한 날 '울 일'만 끊임없이 생 깁니다. 일단 반 안의 남자애들이 여자애라고 그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 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학생회에 참여를 해도 온 통 남자 반장들 사이에서 여자 반장이란 적응하기 무척이나 힘든 까닭입 니다. 그 여자 반장이라는 친구가 진정 자신이 사회적 주체로 동등하게 서고자 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학습된 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었죠. 이 시점에서 한 번 가능성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8명 의 남자 반장과 2명의 여자 반장이 모인 국민학교 학생회.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섞여 있는 조그만 사회인 이곳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남자애 들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저 각자에 게 익숙한 생활 습관들을 인정한 채로 남자들의 문화를 주도적으로 밀고 나가야 되는 것일까요? 숫자로든 힘으로든 우세하고,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을 생각해도 남자들에게 당연히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이니 말입니 다. 대부분이 그렇지만 만약 이처럼 남자들의 문화에 의해 학생회가 주 도되는 경우, 여자 반장들은 두 가지 중의 한 선택만을 할 수 밖에 없 게 됩니다. 그냥 남자애들의 의견을 받아서 행정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정말 발톱을 세우고 덤벼들어 남자애들을 할퀴든지. "남 자애들은 정말 너무 잘난 척만 해. 하나도 모르면서. 바보같으니라구."라 고 여자 반장 둘이서는 학생회 모임이 끝나면 투덜거리겠지요. 이런 상 황에서 국민학교 학생의 절반인 여자애들의 목소리는 그나마 여자 반장 두 명에 의해 기회를 부여받았을지 몰라도 결국 어떠한 힘도 얻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4. 문제의 핵심은 여성과 남성 서로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너무나 다른 문화적 지평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문화적 지평이 교육에 의해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든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그런 것이든지 우리의 관점은 무엇보다 현실 속에 '다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들을 자신들의 잣대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듯이, 남성들 역시 그 동안 '인간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졌던 남성 특수의 문화를 여성에게 도 당연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해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회 의를 한다고 가정한다면 남성과 여성은 어떤 문제를 놓고 그에 대해 중요 하다고 판단되는 근거를 선택하는 방식이나 문제를 해석하는 방식, 자신 의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 심지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결합하는 방 식 등 아주 미묘하지만 중요한 지점에 있어 '다름'을 체험하게 됩니다. 실제 여성들과 함께 논의되는 자리에서 이러한 문제가 그리 크게 부각되 지 않는 이유는 그 자리에까지 오게 된 여성들은 이미 남성의 문화를 어 느정도 '자기화'한 사람들이고, 그러한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이 적어도 공유되고 나누어지지 않을 때 여성들은 함께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합되지 않은 듯한 허탈함을 느낄 수 밖에 없고, 앞서 여자 반장이 그랬던 것처럼 "남자들이 란 자기 벽 속에서 빠져나올 줄을 모르는군. 도대체 쟤네들과 어디까지 이야기가 가능할 수 있을까?"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 어 우리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이런저런 다양한 스펙트럼의 남성들이 사회 속에 자리잡은 것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의 여성 역시 함께 가는 것이 라고 한다면, 더욱더 심각하게 고민되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5. 따라서 만약 제가 '조직 내 성별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너무도 당연시되어온 남성의 문화를 '일반, 당연한 것'으로 받 아들이는 것이 아닌,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저 여성 친구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방식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는 관계 지평의 확대, 남녀 서로에게 보다 진실의 소통을 가능케하는 관계 방식의 모색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막연하 고 머리도 꼬리도 뭐 하나 분명치 보이지 않는 얘기로 보일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연관시켜 보더라도 우리는 함께 가야 할 사람들 중 이른바 '타자'들에 대해 어떠한 배려를 해야 하는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하는 것. 분명 지금까지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타자'였습니 다. 물론 우리는 남성도 여성도 흑인도 백인도 아이도 어른도 그 누구도 '타자'로서만 존재하는 사회를 궁극적으로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길을 나아감에 있어 현재 '타자'임을 부정하고 시작할 수는 없습 니다. 그들을 '타자'로 부정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들을 영원한 '타자' 로 고립시키는 순간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나'만이 '주체'임을 주장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은 안해도 '타자'에게 "나를 따르라"라 고 이야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요. 이러한 방식은 결코 '타자'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흑인이 백인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변호사가 되었지만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편견과 배타에 결국 "나는 흑인이다"라고 외칠 수 밖에 없는 괴로움과 남성 사회에 가까스로 편입 된 여성의 고민이 얼마나 다를까요? 여기서 우리는 "개인 스스로 감당하 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제 '타자'의 목소리를 들어 야 하고,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리고 '타자'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흑인 변호 사처럼 현실 위에서 '타자'임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여성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든지 간에 이제 자신이 '타자'임을 명백히 깨닫고 의식적으 로 싸워나가야 합니다.

6. 이제는 여성 동지들에게 몇 마디 말을 하고자 합니다. 노동자가 해방 의 일차적 대상이기에 그들만이 진정한 주체로 설 수 있는 것과 마찬가 지로 여성 역시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익히 알 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해방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 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의 글이 뻔뻔스럽게도 제가 '여성'을 대변 해서 했던 말이라면, 지금부터는 여러 여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만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성 운동에 대해 항상 동조적이었지만, 그와는 다 르게 제가 '여성 운동가'로서 자리매김되는 것을 암암리에 거부해 왔습 니다. "왜 여자가 운동을 하면 여성 운동을 해야만 하는가?"가 저에게 걸린 문제였던 것이지요. 뛰어난 여성들이 운동권 내부에서조차도 남성들 과 대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단지 '여성 운동'에 한정된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 부분은 남성들이 손대지 않고 저 멀리 던져둔 것 이기 때문에 그나마 여성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 지요. 여성들은 정치, 경제, 역사, 철학 등등에 대해서는, 노동, 빈민, 정보, 환경 등등에 대해서는 항상 남자들에게 넘겨주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음을 부인하자는 것도 아니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100년의 역사밖에 가지고 있지 않음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 러나 어쨌든 여성들이 담당해야 할 부분과 남성들이 담당해야 할 부분은 변혁 공간에서조차 암암리에 구분되었고, 이에 따라 여성의 문화가 지배 적인 곳과 남성의 문화가 지배적인 곳이 분리가 되었습니다. 즉 '여성'이 라는 분과 아닌 분과를 제외하고는 다른 분과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남 성의 문화에 편입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변 혁을 고민하는 여성들의 가장 커다란 무게는, 그들이 어떠한 부분에서 활동을 하든지간에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운동 역시 짊어지고 가야 한다 는 데 있다고 봅니다. 하나만 하는 것도 정말 벅찬 일인데, 이 두 가지 를 다 짊어지고 가야하니 남성 활동가에 비해 그 무게가 이만저만이 아 닙니다. 따라서 일단은 자신의 정체성 찾기와 맥을 같이 하는 여성 운 동에 힘을 쏟는 것이 현재로서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러나 여성 운동을 고민하는 사람은 진정 그것을 고민하기 때문이라도 자 기 활동의 궁극적 방향을 단지 '여성 운동'이라는 부분에 한정시키는 것 이 아니라 세계 전역, 활동의 전영역 곳곳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에 놓아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중적인 부담을 끌어 안고 가야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남성들에 의해 지배되는 여러 각각의 지점들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성은 모두 남성들이 그러하듯 사회 각곳에 참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각곳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싸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분야의 여성들은 그야말로 여성이기 에 진정 남성/여성 공동의 공간으로 세계가 설 때까지는 꾸준히 여성들의 결집체로서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지요. 여성 은 태어날 때부터 혁명가라고. 만약에 우리가 생물학적인 차이로 인해 남 성들보다 자랑스러워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시대에선 바로 그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 '제르미날'을 보았을 때나, '붉은 시편'을 보았을 때나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던 생각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역사 적, 사회적 조건 때문에 끊임없이 남성들과 소통하는 법을 스스로에게 훈련시켜 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입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요. 어떠한 내용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지, 무엇이 우리 가 고민하는 '여성의 내용'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성 이 혁명가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타자'인 만큼 항상 타자들과 이야 기할 수 있는 소통의 개방적 자세가 훈련되어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남 성들과 이러한 소통의 훈련을 같이 해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들도 '타자' 와 이야기할 수 있는, 진정한 혁명가가 되도록 말이지요. 어차피 함께 가 야 할 길이니까요. 긴 글, 혹 마음에 불쾌를 가하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제 그만 맺겠습니다.

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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