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정

 

서론

이 논문에서는 현재 여성운동 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차이'의 문제를 살펴보 고, 그것이 가져온 여성운동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이 필요한 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먼저 제1장에서는 여성운동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페미 니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여성운동 일반'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거나 혹은 여성운동에 있어서의 이론적 논의를 지칭하는 용어로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 또한 '여성운동'과 동일하게 파악되더라도 이른바 제2기 여성운동-남성 과 구별되는 여성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지점에 대해서만 사용되기도 한다. 이 논문에서는 여성운동 일반-실천 및 이론 모두를 총괄하는 의미로서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어 떤 경우 일반적으로 더 친숙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왜 여성운동 내에 이와같은 딜레마가 발생하였는지 그 과정을 짚어보고, 제2장 에서는 현재 제기되는 페미니즘의 문제가 무엇인지 두 가지가 제시될 것이다. 그리고 제3장과 제4장에서는 2장에서 제시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들 및 여성운동에게 요구되는 과제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현재까지의 페미니즘 논의

여성운동은 대체적으로 크게 자유주의 부르주아 여성과 초기 마르크스주의자 들을 중심으로 한 1920년대까지의 제 1기 운동과, 세계적 공황 및 제1,2차 세 계대전 이후 새로운 좌파적 움직임으로 개시된 1960년대 이후의 제 2기 운동으 로 나누어진다{{. 장미경, <오늘의 페미니즘, 세계 여성운동>, 문원, 1996 참 조}}. 제1기 여성운동의 특징은 첫째, 여성운동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설정되어 있다기 보다는 여타 대항운동 속에 같은 '피억압자'로서 함께 움직여왔으며, 둘째, 여성들의 독자적 목소리를 강조한 경우라도 '남성과 다른 차원으로서의 여성'을 강조했다기 보다는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에 주목했다는 것 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은 여성운동이 단지 '여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 해방이라는 변혁운동의 목표와 서로 괴리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이었으나 현실 속에서 남성과는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 처 한 여성들만의 독자적인 상태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제2기 여성운동은 '여성'이라는 범주에 대해 보다 천착하였다. 제2기 여성운 동은 제1기 여성운동의 한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남성에 대립되는 지점으로서 의 여성의 구별되는 특성, 이른바 '여성성'에 대한 고민을 심도깊게 하였다. 여성성에 대한 긍정은 각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경험에 대 해 고민하게 하였고,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연구는 여성운동의 영역을 보다 확장시켰다. 동시에 급진주의 여성운동의 정치적 성공에서 볼 수 있듯 여성들 고유의 과제들을 획득해 나가는 투쟁(예를 들어 가사노동, 낙태, 성폭력 등)을 통해 보다 많은 '여성 집단'의 권익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제2 기 여성운동은 여성의 독자성에 치중한 나머지, 대부분의 여성이 직면하고 있는 빈곤의 원인 및 자본주의적인 칙취 현상에 대해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남성 및 가부장제가 절대적인 적으로 규정됨에 따라 남녀 분리주의를 낳았다.

20세기 후반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 이성의 역사가 '합리적'이라는 단 어에 의해 무작정 옹호되고 신비화되었던 것에 반대하여, 이성의 불완전성과 주체성에 있어 다층적인 차이에 대해 긍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 장들은 주체를 탈중심화함으로써 인간의 능동적인 행위 자체를 해체해 버리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여성운동 내부에 역시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 현재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점

2.1. 평등 대 차이 논쟁

현재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 논의에 대해 러시아 학자인 이리나 글루셴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성들에게 사회에서 더 많은 역할이 주 어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일과, 이 사회의 기본토대들을 비판하는 일을 어떻게 양립시킬 수 있을까 (......) 남성들의 경쟁적 개인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여 성들의 가치들'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남성들이 해온 역할을 맡으려는 욕구를 결합하는 길은 무엇인가?"{{ 이리나 글루셴꼬, '서구 페미니즘과 우리', <창작 과 비평> 1997년 봄 (통권95호)}}

제2기 여성운동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다르 며, 다른 스타일과 문화를 소유한다. 그러한 여성의 양식이 모든 미래사회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조세핀 도노번/김익두,이월영역, <페미니즘 이론>, 문 예출판사, 1993.}}고 주장했다. 이와같은 급진주의 페미니즘 주장의 근저에는 '여성성'에 대한 긍정이 놓여있다. 남성적 세계는 상위세력의 가치에 기초하 기 때문에, 그 가치에 도움이 되는 그런 가치들만을 수용하지만, 그와 대조 적으로 여성적 세상은 함께 하는 즐거움의 가치에 기초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 반적으로 정반대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에서도 연유하는 가치를 포함하여 온 갖 종류의 가치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로즈마리 통/이소영역, <페미니즘 사상>, 한신문화사, 1995. ( Marilyn Fre nch, Beyond Power: On Woman, Men and Morals, 1985에서 인용)}}

여성성의 강조는 여성의 사회역사적인 독특한 경험을 인정함으로써 여성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특수한 권리들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여성성의 옹호와 여성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건설하고자 하는 시도는 자본주의의 열악 한 노동조건 하에서 남성들과 동일임금을 받고자 투쟁하는 여성들의 요구와 같 은 남성지배적인 영역 내의 여성의 권리 쟁취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무 력할 수 밖에 없다. 즉 여성들의 요구 중 상당부분은 여성들만의 독특한 경험 을 강조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성과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인정받는 것 에 의해 쟁취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과 남성 간의 '평등 및 차이' 문 제는 여성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2.2. 여성 집단 내의 차이

1970년대 이래 서구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맞물리면서 '여성 집단 내의 차이'에 대한 문제로 수렴되고 있다. 먼 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여성들이 계급에 의해 분리된다는 것은 너무 나 명확하다. 부르주아 여성들에게 투쟁의 관건은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남성 지배, 남성 폭력 및 여성의 신체에 대한 통제와 관련된 문제이다. 반면 노동 계급의 여성이나 농민여성들이 갖는 정치적 우선권은 가난과 착취를 제거하고 자 하는 데 있으며, 이것은 계급이 다른 여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계급 남성이나 남성 농민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문제가 된 다. 또한 여성들은 다른 인종이나 민족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다른 종교 를 가진 사람으로서도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다. {{ 캐롤린 라마자노글루/김정선 역, <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 문예출판 사, 1997.}}

제2기까지 여성운동이 존속해올 수 있는 근거는 이른바 '여성'이 전세계적으로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여성들이 가부장제와 맞서 공동의 투쟁을 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서였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 공동의 인식은 '자매애'라는 이 름으로 정당화되어왔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인종, 지역, 종교, 계급과 같은 다양한 근거로써 분리될 수 밖에 없다면 동일한 억압에 근거한 자매애의 개념 은 훨씬 더 제한적으로 파악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와같은 상황은 여 성들의 공동 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여성들 사이의 분리를 자아냄으로써 여성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은 '여성들의 다양한 이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결합해 낼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3. 남녀 공동의 공간으로서의 공동체에 대한 모색

3.1. 주체의 동일성 문제

첫 번째 제기된 '평등 대 차이'의 문제는 여성이 남성과 더불어 현실 속에서 '동등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권리를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지 못하다 는 전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이 하나의 주체로 사고되고 있는 지, 이에 대한 이리가라이의 문제제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헤겔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의 패러다임으로서 가족과 부계의 지평에 사로잡 혀 있었으므로 양 성 사이의 문화를 사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차이가 아닌 대립이라는 방법을 채택하는 헤겔에게서 '성별화된(sexu )' 동일성은 '자연적 무매개성'으로 가족 내에 국한되고 결국 성화된 동일성은 시민에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성화된 시민법, 시민적 권리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리가라이는 마르크스/엥겔스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기원이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 취임을 인지했음에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은 '노동으로서 사랑'에 대한 이같은 헤겔적 관점에 기인함을 지적한다. 따라서 헤겔 비판은 성적 차 이에 대한 동일화적이고 대립적인 헤겔적 관점을 공유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한 계개념을 사회적 유대에 기초한 성적 윤리로 확정할 수 있는 시사를 주는 것 이다. {{ 윤소영,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 p.36 0. ( L. Irigaray, "Love between Us", Who Comes after the Subject?, Routle dge, 1991에서 인용)}}

헤겔에 있어 시민 개념은 '남성시민'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 자연의 부분이므로 인간 재생산 영역인 가족 속에서만 주체로서 위치지 어지고, 반면 생산의 영역인 공적 영역에서는 삭제되어진다. 마찬가지로 헤겔 을 이은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에 있어서도 아버지 혹은 남편의 계급과 동일시 되는 여성은 생산 관계 내에서 사실상 주체의 역할을 박탈당한 존재이다. 따 라서 지금까지 여성운동 내부에서 마르크스의 계급 범주는 불완전한 것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성의 주체성이 (남성)시민이라는 가상적 동일성에 환원되어져(혹은 삭제되어 져) 왔다는 사실은,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성적 차이에 근거한 주체로서의 여성 의 역사가 가부장제 및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새롭게 쓰여져야만 함을 의미한 다. '평등 대 차이' 논쟁은 사회 내에서 여성이 동등한 성적 주체로서 사고되 기 전에는 무의미하다. 결국 문제는 여성이 또 하나의 구별된 주체로서 사회 속에 그들의 입지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 되며, 그 첫 번째의 과제로서 여성 은 삭제되어진 자기 역사 서술 과정을 행함으로써 주체의 완전한 역사를 복원 시켜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진정한 의미에서 남녀 공동의 사회를 구성 하기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3.2. 대안적 공동체를 위한 사회변혁의 문제

인간성과 관련하여 여성운동의 지향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변화된 인간형, 즉 양성(兩性) 모두 공유된 성정체성이나 몇몇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양 성{{ 남녀 성 구분에 대해 생물학적 결정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간주되어지는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양성 소질을 가진 동물이다. 개인은 대칭적인 두 부분의 융합체인데, 일부 연구자에 다르면 절반은 완전히 남성적이고 절반은 완전히 여성적이라고 한다. 각 절반이 원래 상반되는 두 가지 성질을 아울러 갖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성은 생물학적 사실이고, 정신 생활에서 두드러 진 중요성을 갖고 있지만 심리학적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는 모든 인간 의 본능적 충동과 욕구 및 속성에는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이 뒤섞여 있다 고 말하곤 한다...심리학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점점 희미해져 결국 능동 성과 수동성의 차이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너무 쉽사리 능동성을 남성적 성격 과 동일시하고 수동성을 여성적 성격과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동물계에서는 결 코 보편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견해다."

프로이트/김석희역,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1997}}을 포함하는 인간성으 로 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의 개방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남성성으로 환원되어 졌던 인간성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여성의 자기 역사 복원으로만 해결되어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말을 들어보자.

삶을 영위하는 방법 가운데, 노동에 중점을 두는 것만큼 개인을 현실에 단단히 붙들어 매는 것은 없다. 노동은 적어도 현실의 일부분-인간 공동체-에 안전한 자리를 확보해 주기 때문이다. 노동은 사회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자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가치를 갖고 있지만, 자기 애적이거나 공격적이거나 관능적인 리비도의 구성 요소 가운데 상당 부분을 전 문적인 일이나 그 일과 관련된 인간 관계로 돌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가치를 갖는다. 문명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리비도적으로 한데 묶으려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문명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강력한 동일시를 확립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지지하 고, 우정 관계로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목적 달성이 금지된 리비도 를 대규모로 불러일으킨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성생활을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 op. cit. p.262.}}

사회에 의한 성적 욕망의 규제가 인간을 노동으로 더 확고히 편입시킬 수 있 느냐와 관련된다는 것은 곧 인류가 공동체의 유지 및 확장을 위해 각종 윤리와 도덕을 통해 원하지 않는 희생을 인간 개체에게 요구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것은 현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타당한데, 즉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 논리에 의거한 보다 효율적인 노동 편제를 위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 리시켰고, 그 결과 여성에게서 공적 영역 내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했던 것이 다. 또한 당연히 사회가 분담해야 할 노동력의 재생산 부분은 오로지 여성이 가정 내에서 감당해야 될 의무로 부과됨으로써, 보다 많은 잉여를 지배계급에 게 제공하는 대신 개개인의 자유로운 욕망 발현의 기회를 억제해 왔던 것이 다.

프로이트의 주장대로라면, 물적 조건의 향상은 인간에게 보다 자유로운 욕망 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자리잡아야만 한다. 만일 이와같은 근거를 방해하는 각종 억압 조건들의 변혁이 수행된다면, 남성 여성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다채롭게 고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엄청나게 확대될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성정체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일탈, 비정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현 사회의 지배 체계(생산 체 계)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성정체성에 대 한 요구를 확장시킴으로써 지배 체계의 균열을 가속화함과 동시에, 억압조건에 대해 직접 문제 제기함으로써 다양한 성정체성에 대한 가능성을 확대시켜 나가 야 할 것이다.

4. 여성 집단 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모색 4.1. 권력의 재구성 문제

모든 혁명에는 지배에 대한 투쟁이 승리할 만한 역사적 계기가 있었다. 그 러나 그러한 계기는 언제나 헛되이 지나가 버렸다. 세력의 미숙이나 불균등 이라는 이유의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자기 패배의 요소가 혁명의 역할 속에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죄의식의 기원과 영구화에 대한 프로이트의 가정은 심 리학의 용어로 이러한 사회적인 역학을 해명하고 있다. 이 가정은 반항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반항하는 권력의 동일시를 설명해 준다. 개인을 노동의 계급 조직체계로 합병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은 지배의 대상인 인간이 자신 의 억압을 스스로 재생산하는 본능적 과정을 수반한다. 증대하는 권력의 합 리화는 증대하는 억압의 합리화를 반영하는 듯하다.{{ 마르쿠제/김인환역, < 에로스와 문명>, 나남, 1996, p.100.}}

기존처럼 저항세력을 보다 '빨리' '강하게' 세우기 위한 전략으로서 일차적인 적을 규정하고 중앙집권적 체계 속에 힘을 집중하는 방식은, '저항'의 순간에 있어 막강한 힘을 소유할 수 있었을른지는 모르지만, 결국 싸움의 승리 이후 내부적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권력의 오염을 제거할 수 없었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권력의 제거 혹은 권력의 약화가 아니라 권력이 구성되는 방식이 다. "권력이란 가능성의 정치에 대한 관심 안에서 작동할 수 있으며, 지배의 힘에 대한 반동으로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전망과 미래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반응을 통해 피지배 집단의 서사를 다시 작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 앙리 지루, '교육담론의 경계를 가로질러-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 고 페미니즘', <학회평론> 통권13호, 1997. (Teresa de Lauretis, Feminist St udies/Critical Stidies, 1986에서 인용)}}는 주장은 고려될 필요가 있다. 즉 권력은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 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던 '여성성'의 긍정은 무엇보다 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에 놓여 있었다. 여성은 그들이 오랫동안 타자였다는 점에 의해, 그리고 다른 타자(노인, 어린이, 청소년)들을 보살피 도록 의무지워졌다는 점에 의해 타인에 대한 이해를 훈련시켜왔던 것이다. 여 성운동 내에서 권력 재구성의 방식을 이른바 '여성적 방식'이라고 일컬어 왔 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근거 때문이다. 이것은 다양한 조건들의 사람들을 소외 시키지 않고 공존하게 할 수 있는 사회 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동시에 효율 성의 이름으로 현실의 구체적인 부분들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 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지금까지 권력이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통 해 공동체 내에 억압을 재생산하지 않는 다른 형태의 권력 관계를 구상하고 실천하는 일에 집중되어져야 한다.

4.2. 연대의 정치학

결국 '여성집단 내 차이' 문제의 해결은 가부장적 지배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 을 여전히 중심적인 과제로 놓으면서 각기 다른 조건들을 부정하지 않고 연대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대가 가능할 것인가. 여기서는 '연대의 정치학'이라는 이름 아래 연대를 가 능케 할 새로운 조건들의 마련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연대의 정치학은 개개인에게 자아에 대해 문제제기 및 자아와 공동체 간의 관계를 질문할것을 요구한다. 자아에 대한 문제제기는 각 사람이 자신의 성, 인종, 민족, 계급, 언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동체 내에서 구체적인 자기 근거에 의거한 진실한 주체를 형성해내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또한 공동체와 자아 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자아 에게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부여함으로써 현실에 강제되는 억압 조건들에 대한 투쟁을 가능케함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자아 및 공동체의 긍정적인 미래를 구상하게끔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둘째, 연대의 정치학은 해방의 관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행동과 관계시켜야 하는 임무를 요구한다. 억압 조건을 변혁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 중에는 분리주의적인 성격역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내용이 분리주의적이냐 아니면 타협적인 성격인 것이냐가 아니라 분리를 선택 하는 여성과 다른 선택을 하는 여성들 사이의 지속적인 정치적 관계이다. {{ 캐롤린 라마자노글루, op. cit. 참조}} 이러한 정치적 관계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관계만이 공동체의 미 래를 위해 다양한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할 것이며, 동시에 억압에 대한 투쟁에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의 정치학 은 단지 여성운동 내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와같은 새로운 관계의 모색은 다양한 주체들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세 로서 이 시대에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

현재까지 약 300여년동안 여성운동이 지속된 이래, 페미니즘 내에서는 크게 두 가지 정도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첫 번째는 여성운동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 를 확보해야 하는 것과 여성의 독자적 근거를 만들어나가는 것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각기 다른 조건으로 인한 여성 집단 간 의 분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먼 저 사회에서 인정되어 온 주체의 동일성에 대한 문제를 의심해 봄으로써 공동 체 내 여성의 주체성이란 하나의 가상이었음을 확인하고, 실천적 과제로서 여 성 주체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자기 역사의 복원'과 새로운 공동체 성립을 위한 조건으로서 지배-피지배 구조 변혁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두 번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변혁운동이 가졌던 중앙집권적 권력 방식의 문제점을 고찰하고,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는 방 법으로서 '연대의 정치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 시대 우리가 획득해야 될 몇 가 지 자세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아직까지 한 번도 실현되지 않은 관계의 구상을 하는 것은 그것이 설령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요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환상으로 간주되어질 수 있다. 논의가 실천적인 문제와 관련된 경우에 더욱 추상적일 수 밖에 없음은 바로 그 까닭이다. 실천적인 논의는 결 국 그 논의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실천적으로 유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판단 되어질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지금까지의 논의가 여성운동이 전진할 있 는 계기로서 역할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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