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눈사람>의 강하원이라는 여성은
손으로 만져질 것 같은 서늘한 한기를 뿜으면서도 안에는
뜨거운 열을 안고 있는 인물이었다. 난다는
그때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그러한 여성의 이미지를
그립지만 얼굴을 모르는 꿈속의 사람처럼 만났던 기억이 있다.
난다 : 제가 늘 아쉬웠던 건 우리 문학에서 다양한 여성의 관계가 그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예컨대 <회색 눈사람>과 같은 작품에서는 남성인 안과 강하원의
겉으로 드러난 관계보다 여성과 여성의 관계, 김희진과 강하원의 관계가 매력적이지
요. 그런데, 선생님 작품에서조차 세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여성의 관계는 그다지 인
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머니와 딸, 혹은 선생님과 제자와 같은...
윤 : 그거는요. 정말 나한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어머니가 나한테 얼마만큼 중요
한지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내가 어머니 돌아가신 것에서 벗어난 지가 몇 년이 안
돼요. 어머니 얘기를 못했습니다.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는 정말 어머니 이야기를 한번 꼭 할겁니다. 지금도 찾고 있어요, 어머니 얘기를 어
떻게 할까. 나오겠죠. 언젠가. 그게 한번 터지면, 굉장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 개인
적으로요. 작품이 어떻다는 건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
요. 어쩌면 내가 못 나서 죽기 전에 못 쓸 수도 있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어머니가
드러나겠죠. 어떻게 안 드러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만난 인격 중에 가장 나를 강
력하게 설득한 인격이 우리 어머니에요. 여성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어머
니의 죽음을 부인했지요. 어머니의 죽음에서 조금 헤어났으니까, 이제는 뭔가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뭔가가 이렇게 고이는 걸 내가 느낍니다.
난다 : 소설을 읽어도 그렇지만 말씀하시는 걸 들어도, 청각적 이미지가 굉장히 강
하다는 걸 느낍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작업을 하실 때 꼭 음악부터 튼다고 하시
던데, 최윤 선생님은 곁에 어떤 소리들을 두고 작업하실 거 같애요.
윤 : 난 꼭 음악을 귀에다 꽂고 해요. 늘 그냥 살던 집이 별 볼 일 없고 시끄러워서
, 사실 맨 처음에는 소리 차단하느라고 이어폰을 끼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게
습관이 되었지요. 그래서 한 작품 쓸 때는 꼭 한 음반을 고릅니다. 그러니까 음악을
듣는게 아니라 음악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희박해진 음악의 공기 속으로 들어가
서 쓰는 거지요.
난다 : 그 음악의 리듬이 소설의 리듬과 맞아야 할텐데.
윤 : 아, 그래서 그거 굉장히 까다로워요. 음반을 하나 골라질 때까지의 제의적인
변덕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난다 : 무리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청각적 이미지로 모티브가 촉발되는 작가가
훨씬 여성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는 압도하지만 청각적 이
미지는 독자를 더 고요하게 하는 것 같아요.
윤 : 아, 그럴 수 있겠네요. 왜 그럴까요. 시각이 상당히 폭력적이죠, 때로는.
난다 : 지금 쓰고 있는 작품 있으세요?
윤 : 아, 그럼요. 늘 있죠. 손이 근지러워서 어떻게 해요. 단지 그것이 다 발표될
것인가는 딴 문제죠.
그런 대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쓰는 작품이 척 하고 발표해도 되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대가가 되기 싫어요. 그런 때가 있었죠. 그런 게 먹혀들어갈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나같은 작가한테는.
쓰고 있는 작품을 두고 있는 작가 옆에서 난다는
임신한 여자 옆에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게다가 작가는 아직도
쓰고 싶은 작품이 아주 많다고 말해주어서 더욱 안심이 된다.
난다 : 좋아하는 작가들은 늘 조금씩 밖에 안 쓰는 것 같아요.
윤 : 그럼요. 많이 쓸 필요 없죠.
인터뷰를 끝내면서, 난다는 어제 VJ음과 종로에서 산
잠자리 목걸이를 선물했다.
윤 : 이건 가을을 기다려야 되겠네요. 정말 거짓말 안하구요. 내가 산거는 하나도
없어요. 나는 이걸 사고 싶어,라고 한 적은 있어도 내가 가진 모든 악세사리는 선물
이에요. 내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거지만,
난다는 용기가 없어서 하고 싶은 질문들을 망설이며 하지 못했다.
난다 : (나가는 인사를 하려고 엉거주춤 일어나서) 사실은 개인적인 걸 묻고 싶었어
요.
윤 : 하지 그랬어요!
난다 : (깜짝 놀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 싫어하실 것 같았어요.
윤 : 예전에는 작가가 작품 이전에 주변적인 이야기로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피했지
만, 이제는 내 작품이 그런 식으로 오해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
제는 안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아아아, 우리는 늘 바로 앞에 펼쳐져 있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쳐 버
리는 것이다...
윤 : 하하,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위험하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 난다의 은밀한 즐거움은
돌아오는 길에 녹음기를 귀에 대고 돌려듣는 것이다.
최윤 선생님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설득적'이고 절도있게 부드러워서
리와인드로 돌아가는 '삼인칭'의 시간에서 나오고 싶지 않게 한다.
난다의 더듬거리는 말투, 가늘고 약한 목소리, 서투른 질문들을
부끄럽게 한다.
무슨 말을 하시나, 하고 듣다가
"목소리가 더 많은 말을 하지요"
하는 말씀이 생각나서 그냥 목소리만 듣는다.
겨울이고,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입고 바쁘게 지나다닌다.
아무도 난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 목소리는 예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겨울 이미지를
한꺼번에 불러내고, 난다가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자꾸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난다가 독자로서 계속 그렇게 했듯
다시 그 답들을 상상해보라고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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