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끝, 혹은 오래된 시작(2)

 

그녀의 단골인 세리 미용실의 양언니는 그녀의 머리를 처음으로 만질 때, 이렇게 숱이 많고 심한 곱슬은 처음 본다며 관리하기 힘드시겠다 언니, 라고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묘한 말투를 흘렸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을 들으며 이 미용실도 이번 한 번으로 그만 오게 되겠군 하고 생각을 했었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가 미용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곱슬머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애 머리가 저래서 어쩔꼬 를 수도 없이 말하던 어린 시절의 동네 아줌마들이나, 너 파마했지 하며 툭하면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가던 가정 선생님들을 그녀는 어린 시절 내내 증오했었다. 그 당시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보고도 그것에 대해 아무 언급 없이 머리를 다루어줄 미용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양언니의 두 손이 머릿살을 주욱 훑어 내려 목줄기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그 손이 무척이나 끈끈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 잡았던 엄마의 축축하게 젖은 손길을 연상시키는 그 끈끈함에 그녀는 이곳을 단골로 정해버렸다. 양언니의 끈적한 손길이 머리카락을 조금 씩 잡아 분홍, 노랑, 초록의 플라스틱 판때기에 대고 펴 나갈 때면 그녀는 자기 자신이 빨랫바구니에 자근자근 담겼다가 다시 다림질되는 구겨진 옷이 되는 몽상에 빠지곤 했다. 머리에 한 다스도 넘는 색색깔의 플라스틱을 붙이고 나면 그녀는 서비스로 내어주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두 주치의 잡지를 해치웠다. 두 주만 있으면 다시 곱슬로 돌아갈 머릿결, 두 주만 있으면 모두 갈리는 패션 잡지와 여성 잡지들... 모든 게 그다지도 소모적인 그 곳에서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끈끈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훑는 내내 농담을 중얼거리는 양언니 때문도 아니고, 플라스틱의 산들을 저마다 하나씩 머리에 이고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붙여오는 아줌마, 아가씨들 때문도, 그곳이 대부분 여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통계적 사실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작은 벨이 하나 웃으며 달린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에 몰려오는 파마약 냄새와 후끈한 헤어 드라이어 바람의 열기, 그리고 미용사들이 시켜다 먹고 쌓아둔 찌개 백반 등의 빈 그릇이 풍기는 묘한 쉰 냄새들 때문이었다고 해야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 안에 들어서면, 어지러이 돌아가는 손놀림들 아래의 머리카락 주인들은 하나같이 굶주린 동물과도 같은 눈빛으로 거울 속의 자신, 혹은 가위를 노려보고 있다. 거울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눈 속에 하나같이 담겨있는 정서는 바로 '욕망'이다. 흔히 거울을 보며 자기 안의 회한, 절망을 읽어내는 그녀에게마저도 미용실의 커다란 거울은 욕망을 허락한다. 그러면 그 욕망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 결국에는 미용실이라는 작은 공간을 벗어난다. 마치 그곳의 거울은 그저 매개체일 뿐인 걸하고 말하듯이.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모든 욕망의 기저라고 생각했던 생머리에의 욕망이 정작은 가장 큰 구속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몰랐다.

세리 미용실은 그런 공간이었다.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다 '언니'가 되는 곳,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모두가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곳, 대통령보다 미스코리아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어린 시절의 꿈을 단 두어 시간 동안은 마음껏 분출해도 되는 곳. 하지만 정작의 욕망은 미용실을 벗어나는 곳...

미장원에서 머리를 편 날이면 그녀는 항상 근처에 있는 쇼핑 센터에서 쇼핑을 하고 우동을 먹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왜 그녀가 파마한 다음에는 항상 쇼핑을 하게 되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잘 모르지만, 부스스했다 쫙 가라앉은 머리의 공간만큼의 간격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유독 파마한 다음의 쇼핑에서는 많은 물건을 샀고, 우동을 국물까지 남김없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아주 조그만, 따로 달린 방이 없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하지만 원룸이라는 세련된 단어를 붙이기에는 좀 촌스런 구석이 있는 아파트이다. 그러나 그 안을 그녀는 하나의 집처럼 보이게 하기보다는 부엌 등의 공간은 바깥에 따로 달려있고, 이곳은 그저 그냥 어느 집의 쪽방일 뿐이다라는 느낌이 들게끔 꾸며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집에 처음 들어선 사람들은 마치 그 조그만, 방도 없는 아파트가 콧대를 세우며 구질구질한 부엌이나 세탁실 같은 건 흥이지 뭐 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녀는 이 집에서 단 한번도 요리라는 걸 하는 적이 없다. 아침은 냉장고에 쌓여 있는 인스턴트 식품 중 하나로 먹고, 점심은 사먹고, 저녁도 사먹거나 아님 집에서 먹는 날이면 동네 어귀에 있는 도시락 전문점에서 사다 먹는다. 자율학습을 위해 도시락을 사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줄을 서서 배급처럼 짜여진 칸에 맞추어 나오는 도시락을 들고 집에 가면, 그녀는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 학생 마냥 서둘러 그것을 먹고는 혹 집안에서 음식냄새라도 날 까 꼭꼭 봉해서 버린다. 누군가가 이런 그녀의 생활을 엿본다면 그리고 라면 끓일 냄비 하나 없는 그녀의 부엌(부엌이라고 해 봐야 선반 두 개 짜리 싱크대로 끝이지만)을 본다면 그녀가 끔찍이도 요리를 못하나 보다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계량컵이나 스푼 한 번 쓰지 않고도 눈대중만으로 쓱쓱 뚝딱 한 상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수준 급인 요리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는 곱슬머리를 평생 스트레이트 파마로 가리고 사는 것처럼 자신의 손에 어쩔 수 없이 유전인 양 묻어있는 요리 솜씨 또한 철저히 숨기고 살아 왔다. 회사 내에서도 그녀는 자기 손으로 커피 한 번 끓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돈을 아끼려고 하루도 빠짐없이 도시락을 싸오는 다른 여직원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손은 언제나 물기하나 없이 말라 있었다. 그리고 남자 사원들은 시큼한 행주 냄새나는 다른 여직원들 손보다는 가을날 단풍잎 마냥 바삭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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