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림     
  • 리건

    4. 내 삶에 대한 통제력
    내가 살림을 한다는 건, 정말이지, 무슨 뜻일까?
    웃고 있는 귀여운 돼지 얼굴이 그려져 있는 소시지를 슈퍼마켓에서 집어들 때나, 파파이스에서 치킨 런(아니, 닭들이 농장을 탈출해서 기껏 파파이스로 뛰어들어왔단 말인가??) 세트를 고를 때, 나는 그 음식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무엇을 알고 있나.
    내가 사먹는 이 햄버거에 소 몇 마리가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소들에게 무슨 사료를 먹였는지 알 수도 없고, 그 소들 중에서 병들어 죽은 소는 얼마나 있었는지, 심지어 소 말고 또 무엇이 들어갔는지도 사실 알 수 없다.
    이 냅킨에 쓰인 종이가 어떤 울창하고 아름다운 삼림을 베어 넘기면서 만들어졌는지,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은 어디로 쫓겨났을지, 벌목 기계톱에 누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그 쓰레기 매립장이나 소각장은 안녕하신지, 매립장의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쓰레기는 몇백 년 뒤에 분해되는지 알 수도 없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이 물은 수도꼭지를 통해서 등장하고, 화장실 바닥을 통해 퇴장하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하수구에 머리카락이 막혔을 때 쓰는 뻥뚜러가 다시 내가 먹는 물 속에 섞여 들어갈지 아닐지 역시 나는 모른다.
    내가 오늘 산 옷을 누가 만들었을지, 그 노동자 소녀는 얼마나 어리고 얼마나 잠 안 오는 약을 먹어가며 밤샘을 하는지 얼마나 모욕과 학대를 당하는지 얼마나 월급을 떼이는지, 내가 직접 탐정이나 기자가 되어 기나긴 추적조사에 뛰어들지 않는 한 절대 알 수 없다.
    연인에게 주려고 산 장미꽃에 농약과 속성재배약과 살충제를 얼마나 뿌렸으며, 그 꽃을 재배했을 지도 모르는 남미의 노동자의 손은 농약에 절어 마비되고 곱아 있는지 아닌지, 당연히 알 길이 없다.
    친구에게 선물할 화장품에 색소와 인조향과 방부제와 알코올 말고 별 뾰족한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나, 화장품 가격에 억대 모델료와 광고비, 용기와 포장 가격을 뺀 진짜 값은 몇 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고? 하지만 토끼눈 자극 테스트(드레이즈 실험)를 거친 화장품이란 사실이 표시되어 있었다면 구입을 꺼리게 되지 않았을까?
    집 장식을 위해 산 예쁜 열대어가 동남아 어느 해안에서 예닐곱살짜리 소년이 맨몸으로 잠수해서 잡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 잠수 때마다 오래 물 속에 머물게 하려는 고용주가 그 아이의 발목에 돌을 매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산소부족에 시달리던 그 아이는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열대어를 살 마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도 모니터를 들여다보기 위해 사용하고 있을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전기료는 어떻게 책정되고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우리가 전기에 의존하는 정도에 비해서 너무 아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편적으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
    드럼통에 무슨무슨 폐기물을 담아 어느어느 뒷산에 파묻었다더라, 어느어느 갯벌에 부어버렸다더라, 어디서는 물고기가 떼로 둥둥 떠올랐다더라, 어느 나라에서는 무슨 누출사고로 몇 명이 죽었다더라, 광우병이 이 나라 저 나라로 퍼지고 있다더라,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를 협박해서 퇴직시켰다더라, 어느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식중독에 걸려서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더라, 손가락이 칼날에 잘려서 섞여 들어갔는데도 소시지 만드는 기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더라.....
    내 삶과 살림에 대해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저 상품을 구입할까 말까, 저 티비 프로그램을 볼까 말까 하는 정도에 그친다. 정확히 말해서 그건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으므로.

    알 수 없는 이유로 건강이 계속 나빠지고 원인 불명의 스트레스로 마음이 피폐해진다고 느낄 때마다, 살림을 직접 꾸릴 수밖에 없는 정도의 규모로 살림이 '작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유치하게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려는 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직접 경영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살림이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분업과 소비와 단절과 무기력을 넘어선 삶다운 삶... 그렇게 살림의 규모가 작아지는 대신 세상을 총괄적으로 관통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면, 지금의 살림꾼이 풀 코스 집안 살림을 연장시켜 더 넓은 범주에서 세상과 교류하는 모듬 살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득도겠지? 물질과 에너지와 가치와 시간과 노동과 사건을, 그것들이 생겨나고 움직이고 섞이고 흘러오고 흘러가는 과정을 마음의 눈으로 꿰뚫는 현자.
    그리고 아직 그런 작은 삶을 꾸릴 공동체를 만들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최대한 검소하게 살자고 말하고 싶다. 세상을 살리는 '살림'을 하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천리안을 가지는 준비 단계로. 그러면서 엄마들을 무식하고 무능하고 무례하고 '개념없고' 주책없는 악다구니가 아니라, 현명하고 지혜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 미래의 현자로 상상해볼 수 있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인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볼 때, 나는 단순히 노트북만이 아니라 이 노트북이 나오기 위해 일어났던 모든 과정과 앞으로 이 노트북을 구성하는 물질들에게 닥칠 미래까지 본다....(이영수의 '면세구역' 안의 "나비 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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