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난다 |
|
13. 친구
|
|
친구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내 '사회적 안전망'은 친구들이다. 든든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밖에 나갔을 때 안정감 있어보이는 것처럼 나는 친구들을
빽으로 가지고 있어서 무서운 걸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아무 것도 없이
집을 나와버렸던 것이나 불투명한 전망을 앞에 두고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다 친구들 덕택이다. 금전과 애정과 여러 끼니들, 이념적 연대감과 미래의
비전을 공유하는 친구들.
|
|
어머니, 아버지가 아무리 다정하고 언제든지 나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받을 수 없는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이 자식에게 더 중요한 과제가 되는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친구들로부터 새로운 가족을 발견한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처럼, 애정과 증오를 켜켜이 쌓아가고, 서로의
인생에 개입하여 영향을 주고, 서로에게서 할 일을 찾고 쉴 자리를 찾는다. 별
일이 없으면 아주 긴 시간동안 함께 있으리라는 것이 무엇보다 가족과 닮은
점이다. 우리가 좌절하고 성공하고 끊임없이 변화해나가는 동안 한곁같이
지켜봐주는 눈, 그래서 우리가 우리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바로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아닌가. (1109)
|
|
14. 트레펑
|
|
얼마 동안 세면기를 쓰지 않기로 했었다. 어차피 이빨 닦을 때만 쓰고 있었지만,
이빨 닦는 것도 그냥 바닥에 있는 샤워기에서 물을 받아 하거나 씽크대에서 하기로
했다. 세면기의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래, 트레펑!' 트레펑에 써진 대로 그걸 0.5l가량 붓고(그만큼이었는지 뭔지
알게 뭐냐, 어쨌든 적당히 붓고), 30분 지나서 물을 부으라는 걸 잊어먹고, 거기서
그냥 이빨을 닦아 버렸더니, 정말 잘 내려갔다. 이런 일을 해낸 내 자신이 조금
자랑스러웠다. 그렇지만 사실, 이건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 걸. 나는 트레펑이 뭔지, 어떨 때 쓰는 지도 알고 있고, 그게 우리 집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걸 쓸 생각을 못 했다. 살림이란 게
그냥 이런 거 같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 속으로는 알아도 막상 안 해보면
모르는 거. 그래도 누가 와서 알려주기 전에, 내가 생각해 낸 것은 조금
자랑스럽다. (0530)
|
|
15. 흰 빨래, 검은 빨래
|
|
흰 빨래와 검은 빨래는 나눠서 하는 것이라고 제일 처음 알려준 것은 딸기이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딸기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이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 아이는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것을 실천하고 있으면서 아무런
티도 안 내고 있었을까? 사실은 모두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빨래라면, 그냥 다 넣고 세탁기에 돌리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도 흰 빨래와 색깔 있는 빨래를 나눠했던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속옷과 수건을 삶으라는 말만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는
제일 큰 냄비에 일주일에 두 번씩 속옷과 수건을 삶았고(브레지어는 삶으면
안된다는 것도 엄마한테 전화로 물어봐서 알았다), 그게 너무 자랑스러워서
여기저기 말을 하고 다니던 중이었다, 흰 빨래와 검은 빨래는 나눠서 하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
|
흰 빨래와 검은 빨래를 나눠서 해 보고 나서,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것이 흰
빨래라기 보다는 검은 빨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가 한꺼번에
하게 되면 흰 빨래는 괜찮은데 검은 빨래에는 하얀 먼지가 붙은 것이 흉하게 눈에
띈다. 혼자 살면서 흰 빨래, 검은 빨래를 나눠서 모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름에는 흰 빨래가 현저히 우세해서 검은 빨래를 모으려면 몇 주가 걸린 적도
있다. 겨울에는 검은 빨래가 좀 분발을 해서 다행스럽다. 예전에는 옷을
아무렇게나 마음내키는 대로 입었지만, 지금은 흰 옷과 검은 옷을 분배하는데에
주의를 기울인다. 심지어 여름엔 검은 옷을 더 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까지
했다.
|
|
어쩌면 딸기의 그 얘기가 인상깊었던 것은, '흰 빨래, 검은 빨래'라는 말이 예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라는 말과 어감이 비슷하고
'흰 아가씨, 검은 아가씨' 하고도 비슷하고 그리고 왠지 빨래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빨래에는 흰 빨래와 검은 빨래가 있는데, 둘 다 그 자체로 나쁜 것들은
아니지만, 둘을 같이 하게 되면 서로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므로 웬만하면 떼어
놓는 것이 좋다... '
|
|
딸기와 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벌써 지난 봄이다. 혼자 살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모든 사람들과 살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살림을 하면 인생관이
어떻게 바뀐다는 둥의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뭐를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지,
뭐를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말이다. 살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기 마련이고 그걸 하나하나 듣는 것이
나는 참 좋았다. 물론 엄마한테 배우는 것이 가장 많지만 엄마같이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지식,
정답도 없고 완벽한 목록도 없는 지식, 실험을 하듯 경험을 해 보아야 결국 자기
것이 되는 생활의 지혜,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이 그 때는 참 좋았다. (1109)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