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게임!


별족

이미 죽어버린 배우자가 자신을 배반하였음을 알게 된다는 건 극적인 소재인가 보다. '랜덤 하트'란 영화에서 해리슨 포드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 했고,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에서 아내가 죽은 남편의 일기 혹은 편지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종이꽃'에서 아내는 죽은 남편의 애인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무력해진 상황은 그뿐이다. 갈피를 못 잡는 증오라도, 상대가 죽은 다음에야 이해든 오해든 그뿐이다. 좀 더 복잡한 정치적 파고는 무어라도 남겨졌을 때 닥친다.

몇 주 전 베스트 극장에서 남겨진 건 '아이' 정확히 말하자면 '태아'였다.
아내는 남편을 끔찍히 믿었다. 자신에게 극진했기 때문에 모진 말로 곧잘 상처를 냈다.
가난한 그녀가 곤경에 처했을 때 아내의 남편은 그녀를 도왔다. 그녀에게 그는 존귀한 존재였다.
그 남자는 아내를 사랑했지만 아내가 어려웠다. 취향을 시골집에서 기른 남자는 도회의 아내를 동경했으나, 가난한 그녀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남자가 가난한 그녀를 떠난 건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아내 탓임을 알고서다. 남자는 아내를 사랑했으므로 아내가 큰 상처받는 걸 견딜 수 없었고, 그녀를 떠난다. 이미 그녀는 임신 중이었으나, 말할 수 없었다.
그 남자가 죽고 석달이 지났을 때, 아내 앞에 만삭의 그녀가 나타난다. 아내는 남편이 사랑했을 그녀가 당혹스럽다. 가난한 그녀는 아이를 아내의 집에서 낳겠다고 집앞에 짐을 부리고, 곱게 자란 아내는 쫓아 내지 못한다.

이게 뭐야, 어떻게 그녀는 아내의 집에 짐을 부릴 수가 있어. 애초에 알릴 생각이 아니었다면, 아내의 심정을 헤아려야 잖아.

나와 똑같은 불만을 토하는 아내의 면전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여기 있을 자격 있어요, 아이는. 아이 때문이라구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또 부아가 치민다. 뱃 속의 태아의 표현될 수 없는 감정은 성인 여성의 감정보다 우선한다?!

아내가 그녀와 싸우고 집을 나갔을 때-그녀가 아니다. 만삭의 그녀대신 아내는 자신의 집을 나간다.-혼자 남은 그녀는 하혈을 하며 쓰러진다. 늦게 돌아온 아내는 그녀를 병원에 옮기고 초조해한다. 아이를 낳고 정신을 차린 그녀 옆에서 아내는 아이의 미래와 죽은 아이아버지의 바램을 전한다. 남자를 소유할 수 없어 아이를 소유하려던 가난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아내에게 설득당한다. 아내는 남편이 뿌려졌을 강에 손을 넣어 물결을 만들며, '당신이 죽어 어찌 살까 했는데,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네' 한다.

가난한 그녀를 설득해내는 '아이에게 사랑한 그 사람의 성을 주자' 는 말이 무시무시하다. 내 아이에게 내 성을 물려주는 방법이 미혼모가 되는 것 뿐이란 걸 깨닫고 좌절하는 이기적인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한 번도 사랑한 여자의 성을 아이에게 부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지독히 이기적인 남자들을 왜 그런 태도로 대하냐고 분개하는 거다. 지독한 관습의 방향성이라고 여기고 있다.

가난한 그녀가 좀 더 현실적이었다면, 아내가 자신의 감정이 그녀로 인해 손상당했음을 그녀에게 납득시키고, 그녀는 그녀에게 아이가 필요하다고 아내를 설득할 수 있었다면 이 드라마는 다른 색깔이 되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가졌던 아내가 다시 모든 것을 갖고 끝난다는 찝찝함, 아니 그보다는 모든 것을 가졌던 남자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끔찍함으로 끝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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