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페미니즘들 아프신 요틴 -Afshin Yaghtin-
"육체적 미란 개념은 '고깃덩이' 공간을 점해 왔다. 그러나, 네트워크 공간 상에서는 이러한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니터 화면 안에서 단지 비트와 바이트(bits and bytes)일 뿐이다."
"나는 지금 막 슬프고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것은 미친 생각이기도 하죠 ...하지만 당신은 새로 업데이트 된 최신의 컴퓨터를 갖게 되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원할 것인가요?"
나는 우선 '페미니즘'과 '페미니즘들' 간의 차이를 기술하고, 페미니즘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단일한 체계라는 치명적인 통념을 일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이는 내가 믿는 바로는, 페미니즘들의 다양한 활동-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들을 의미있게 구성하고 힘을 실어주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로빈 와홀과 다이안 헌 들은 그들이 쓴 『페미니즘들; 문학이론과 비평전집』의 서문에서, 페미니즘 가설들이 전제로 하는 생각들은 복수의 기반(모체)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개괄하고 있다. 이것은 타자, 비표준적인 것, 다양성에 재난과 같은 지배로 끊임없이 빨려들어가는 세계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권리라는 것을 적용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개념이다. 우리는 각 페미니즘 학계 사이의 연구동기, 연구방법, 경험들의 다양성을 드러내기 위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보다 복수형인 '페미니즘들'을 이용해 왔다. 외부에서 보기에 페미니즘은 일괴암과 같이 완전히 통합되어 있거나, 하나로 단일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미니즘 비평에 접근하면 할수록, 페미니즘 내부에 연구 방법이나 가정 상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음을 알게 된다..... 페미니즘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들은 특정한 신념들을 공유하기는 한다.....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는 것과, 젠더는 텍스트와 역사 속에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페미니즘 문학 비평은 텍스트 외부 세계에서의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상당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에 동의 한다. 20세기말 선두적인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포스트 모더니스트인 도나 헤러웨이 (Donna Haraway) 역시 페미니즘 간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헤러웨이는 그녀가 쓴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성』 이란 저서에 수록된 "사이보그" 부분에서 여성 정체성에 수많은 균열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서구에서의 일반적인 여성에 대한 지배에 대해 상술하면서 그녀는 "모든 여성들을 자연적으로 하나로 묶는 '생물학적 여성'의 존재란 없다." 고 말한다. 즉 그녀는 '여성'을 단일한 범주로 묶는 일련의 분류, 종합 작업은 '타자'인 여성 안의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백인이 아닌 모든 여성을 배제한다. '흑인'이라는 범주는 흑인 여성 및 흑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배제한다. '여성'이라는 범주, 또는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들이 타파하고자 하는 바로 그 위험을 창출한다. 그 위험이란 어느 한 집단, 인종, 성에 의한 다른 인종, 집단, 성의 지배, 나아가 주변화된 자들에 대한 지배이다. (155) 사실, 반박해야 할 것은 '메타 서사' 또는 '거대서사'의 전체를 아우르는 권위이다. 메타 서사에 가차없이 반대하는 입장과 비슷하게, 헤러웨이는 "사이보그 페미니스트들은, '우리'는 통합에 있어서의 자연적인 기반을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며, 어떤 구조도 전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중 어느 누구도 더 이상 타인에게 특정한 현실의 모양새를 강요하는 상징적, 물질적 가능성들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범주화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뿐 아니라 여성의 타 여성에 대한 지배라는 문제를 초래한다. "`우리'는 현실상 그러한 지배들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말할수 없다."고 헤러웨이는 기술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백인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범주는 본질적으로 순수한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이에 주목하도록 독촉 받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러웨이는 사이보그라는 범주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범주의 비순수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페니미즘들은 종종 사적영역으로부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요구들을 이끌어냈다. 사적권리 침해를 들어 당해오는 과정과 함께, 사적인 것은 공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와홀과 헌들이 그랬듯이, 이러한 주제들과의 관계 하에 내부의 `나'를 위치시키는 이유이다. 대부분의 페미니즘들이 지닌 공통적인 목표는 - 모든 페미니즘들에 공통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 현행 시스템들, 예컨대 메타 서사 그리고, 주변인과 추방당한 `타자'를 착취해온 표준적인 신념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성』의 서문에서 헤러웨이는 "'자연의 구성물들(constructions of nature)'은 인종, 식민주의, 계급, 젠더, 섹슈얼러티의 지배로부터 덜 상처받은 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화적 진보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비슷하게, 페미니즘들은 현재 탈식민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등등 만큼이나 20세기와 그 이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논의들이다. 이러한 이슈들은 핵심적인 부분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즉, 이제까지 주변화된 자들에게 제한되었던 공간들을 열기 위하여, 현재의 지배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시스템들을 전복하는 것에서 말이다. 우리('다양한' 페미니스트들)는 다문화주의와 다양성이 보장되는, 그리고 성별에 대하여 개방적인 시스템들을 일굴 것이고, 삶의 모든 측면들에서 억압된 목소리들을 트이게 할 것이다. 헤러웨이가 페미니즘들에 기여한 것은, 우리시대의 삶에 적합한 페미니즘적 사고 - 사이보그 페미니즘, 통합 회로,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의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활성화 - 의 여러 국면들을 유효하게 한 것이다. 헤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과 "부자연스러운, 젠더가 없는 기괴한 세계"라는 사이버네킥스에 대한 헤러웨이의 전망에 대한 반응으로서 앤 발사모(Ann Balsamo)의 '성별화된 몸의 테크놀로지` ('Technologies of the gendered body')를 이 글에서 내 논지의 기반으로 적용할 것이고, 그 밖의 페미니스트 이론가와 저자들 쟈넷 윈터슨(Jeannete Winterson), 조아나 루스(Joanna Russ),그리고 로시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저서를 참조할 것이다. 헤러웨이는 "우리의 시대, 신화적인 시대인 20세기 말, 우리는 모두 괴물들 즉, 이론화되고 가공으로 만들어진, 기계와 유기적 생명체간의 잡종들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사이보그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성적인 측면에서 사이보그들을 어떠한 구조를 지니는가?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 유기체, 기술과 인간성의 결합, '허구적 창조물이면서도 사회적 실재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인류와 기술적 기계와의 결합을 좀더 한정지을 필요가 있다. 왜 우리가 사이보그이며, 어떠한 과정에 의해서 우리가 변형되는 것인가? 헤러웨이는 사이보그를 20세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기계와 생물의 특정한 타입들의 결합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사이보그의 경계를 약화시켰다. 주로, "스스로 활동하는, 인체 공학적으로 디자인된 장치들"로서 `정보' `텍스트' 그리고 `통신' 시스템들에 의한 테크놀로지와의 밀접한 연결 안에서 우리는 사이버네틱 조직으로 변환된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여러 측면에서, 특히 컴퓨터 통신과 정보의 사용에 있어서, 테크놀로지에 의존할 때, 이러한 테크놀로지 장치들이 아직 우리 몸에 직접적으로 부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앤 발사모가 말하듯이, 의족과 같은 생체공학적 장치들과 성형 수단을 통해 우리 몸을 재구성하는 것은 이미 인체에 유용화된 것이다. 약품, 유전자 복제, 전쟁장치, 로봇, 이미지영상, 광고, 미디어시스템을 포함하는 기술적인 조립 이외에, 일상의 정보 통신 시스템으로서 사이보그를 불질적으로 구현하는데 명백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것은 인터넷의 보급일 것이다. 이는 정보의 상호작용과 이의 허구적인 배열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현실로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이곳에서는 인종, 젠더, 육체가 'Net' 공간의 기능적 표현에 의해서 희박해진다. 전혀 일방적이지 않고 순수히 상호작용적인 공간의 장 안에서 , '정신'만이 궁극적으로 총체적 우위를 드러내게 되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상세히 설명하기 전에, 이러한 어렴풋한 암시의 지점들을 조금만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헤러웨이는 "양극적인 관계, 위계적 지배의 관계를 포함하여,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구성하고자 할 때 필요한 관계들이 사이보그 세계에서의 쟁점들이다"라고 말한다. 사이버 스페이스 이론가들은 종종 궁극적인 평등의 매개자로서 기능할 , 사이버 공간의 잠재성에 찬사를 보내왔다. "사이보그들은 유기체적 개체라는 개념을 전복시킬 것이다."라고 헤러웨이는 연급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이보그가 점유하는 젠더 공간은 어떤 유형의 것일까? 혹은 이것이 무익한, 쓸데없는 질문일까? 만일 성역할(gender roles)이라는 것이 유기체적 개체에 의존하는 조건부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가족적 위치가 미리 젠더에 의해 기반지워 진다면, 우리가 "기계와 생명체의 결합"을 생각하게 될때 그러한 성역할이나 관습적인 원칙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 결과는 과거와 현재의 남근중심적 이데올로기들에 확연히 반대되는 것일 수 있다. 테크놀로지가 의학에서, 전쟁에서, 유전자 배치에서, 20세기 말의 영향력 있는 모든 영역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차지하게 될 때 성역할은 모든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 모호하고 실질적으로 변칙적이 된다. 모든 관련된 사고가 텍스트나 사이보그 이미지, 지침, 한조각의 정보, 이해 또는 오해의 코드로 됨에 따라 젠더 그 자체는, 놀랍게도, 부차적인 것이 된다. 전문 기술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고용이 안정되고 복합적인 정보 시스템의 생산과 운영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여성은 비인텔리적'이라는 악명 높은 통념은 전례 없이 사라지게 된다. 이런 직업의 수행에 있어서는 논리와 이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남성적 원리로 구조화된 `이성`이라는 개념은 해체된다. 그러나 사이버, 사이보그 공간의 영역은 완전히 젠더에 대하여 중립적이거나, 대게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만족할 것은 아니다. 헤러웨이는 사이보그가 순수하지 않은 잡종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이보그를 국가 사회주의 뿐 아니라, 군사주의와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사생아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그러나 이 사생아는 그의 혈통에 그리 충실하지 못하다. 그의 아버지는 비본질적이 된다."라고 이어 말한다. 분명히, 젠더의 평등이라는 인식을 계속 위협하는 것은 이 출생의 요람이다. 사이보그를 생산해온 낡은 시스템-군사주의, 가부장제 등-들은 종국에는 바로 그것들이 낳은 '자손'에 의해 파괴되어야만 하는 것들이다. 사이버네틱 환경 안에는 기억, 추억, 이전에 학습된 성향, 편견 - 인간이 기계와 결합할 때 인간이 가지고 오게 되는 - 들이 남는다. 그 결과는 (헤러웨이가 새로운 창조물이나, 새로운 '타자'의 아이러닉한 잡종의 탄생이라고 제시하였듯이) 현실과 허구의 혼성 교배, 겨우 최근에야 발현되기 시작한 '잠재적으로' 자율적인 공간의 새로운 확장이다. 기회들은 놀랄 정도로 접근이 용이하다. '사용자'의 마음속에 이미 체화된 성역할이 이러한 전자공간의 영역에 녹아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그 전자공간이라는 영역은 본질적으로 중성화시키는 효과들을 가지며, 이러한 효과들을 통하여, 우리는 성역할이 얼마나 가공되고 구조화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조직화된 산업사회로부터 분자적으로 분산된 정보시스템으로 변화하는 과도기 속에 살고 있다."고 헤러웨이는 이야기한다. 만일 '모더니즘' 그리고 '산업사회'의 절정기에 원자 폭탄, 즉 우리의 삶, 생명에 대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된 장치를 만드는 속에서 어느 정도 미약하나마 숙고를 해보는 기회가 있었다면 반대로, 통신 기술이 전파되고 정보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는 현상 속에 이미 `포스트 모던' 시대가 자리 잡혀 있다. 본질적으로 문화적 혁신으로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인터넷의 광범위한 확산을, 그것이 여성, 남성, 인종, 문화, 사회 주변부와 지배 집단 등등으로서의 인간성과 상충되는 어떤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간 또는 "개척자" 그리고 새로운 기회라고도 주장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개인과 위계질서 모두 인터넷으로 인해 평등화가 실현되리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헤러웨이는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시스템들 속에서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지배의 정보학 (Informatics of Domination)'으로 대체함으로써 그녀의 사이보그론을 견고히했다. (그녀에 의하면, 이것은 '낡고 익숙한 위계적 지배'를 대체하는 정보 시스템이자 생체공학 기술이다.) 헤러웨이가 지배의 정보학이라고 한 것들 -낡은 시스템들을 대체할 `공포의' 새롭지만 두려운 네트워크 변이를 표현한 목록 중 몇 가지를 추린 것이다. 재현
시뮬레이션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헤러웨이는 분산된 사고 체계 내에서 틀이 지워지는 이항대립항 -자아/타자, 정신/육체, 문화/자연, 남성/여성, 문명/야만, 실재/현상, 전체/부분, 만듦/만들어짐, 능동적/수동적, 옳음/그름, 전체적인/부분적인, 인간/신. - 의 변화에 대해 논하면서 이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주장한다. 남/여의 이항대립 관계의 변화조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여성은 현실적으로 그들의 생산/재생산 영역과 통신 시스템 -지배의 정보 과학이라고 불리는-에서의 통합되고 착취되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정치학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는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관계와 소통하려는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구조화시키는 신화 체계와 의미들의 체계를 포함한다. 사이보그는 일종의 해체적이고, 재조립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이고, 집합적이고, 개인적인 주체이다. 이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재코드화해야 하는 자아이다. (163) 우리가 사이버 공간속으로 파고들어감에 따라, 섬유 광학 장치와 상상력의 실체 안에서 우리가 점점 더 많이 컴퓨터 기술을 접하고 이로 타인과 상호 교류를 함에 따라 상상 속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네트워크와 회로가 탄생했다. 우리는 테크노 중심의 새로운 가능성의 장들을 쌓아 올리고 있다. 그곳은 우리의 이름이나 신체로써가 아니라 정신이나, 상상, 환상으로써 들어가게 된다.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용가능하게 된 새 구성물들이나 통신 혹은 이론들을 통하여, 이러한 '우리의 상상력을 구성해온 통념들과 의미들'은 재젠더화되고 재 코드화 될 수 있다. 사이버 공간 안에서, 육체는 뒤에 남겨진 채 우리는 반쯤 걸러진 정보, 상상력, 그리고 혼재된 인격에 들로 가득찬 영역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이미 앞서 언급하였듯이, 애초부터 젠더에 있어 중성적인 공간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사이버 공간에 발을 들일 때 따라붙는 신화적 이데올로기적 윤곽들 때문이다. 그 공간 안에서 또 그 공간을 통해서 정신과 상상력이 재코드화됨으로써 , 우리는 실제 세계 뿐 아니라 전자공간 안에서도 일치된 생활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영역 안에서, 지배적인 사고의 망령들을 없앰으로써, 우리는 서서히 세계를 재코드화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과 생체공학 기술은 우리의 `육체'와 `강제적 의미들'을 재구성하는 도구적 장치로서 응용되어 왔다. 이러한 담론 안에서, 페미니스트 공상과학 소설, 환상 소설 작가들에게도 낙관적인 전망이 보이는 기회가 페미니즘 이론가 로시 브라이도티 (Rosi Braidotti)가 포스트모던 조건이라고 명명한 `고전적 인본주의의 파국 위기'를 보정하고 간과하는 현 세태 속에서, 공상과학 소설 같은 비주류 문학장르는 우리시대의 당혹스런 논쟁들에 대하여 감상적이지 않은 해답을 제시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브라이도티는 "주류문화가 인본주의적 확실성들의 상실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반면, 비주류 문화 생산물들은 이 위기를 전면화하고 그것의 창조적인 해결 가능성을 부각시킨다." 고 언급하고 있다. 비도덕적 부정에 맞서, `비주류' 문화 장르들은 분명한 자아인식의 윤리학을 구성하였다. 서구 포스트모더니티 안에 남은 최고의 도덕적 인물 중 몇몇은 공상과학 소설가이다. 그들은 인간(Man)이라는 인본주의 이상의 죽음 위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우리 시대의 문화적 관심의 죽은 심장에서, 이러한 상실-그리고 그것이 포함하는 존재론적 불안-을 직시하고 있다. 휴머니즘의 위기를 상징화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이러한 창조적 영혼들은, 니체를 따라서, 위기를 가장 내밀한 해결 지점에 이르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포스트모던 문화의 쟁점에 있는 죽음을 인식할 뿐 아니라 현 문화의 (무)질서의 부적절함을 가리고 있는 노스텔지어란 막을 걷어낸다.(2) 헤러웨이 같은 페미니스트 작가들에 의하여 종종 인용되는 페미니스트 공상과학 소설 (혹은 사이보그 소설)의 한 예는 조안나 루스(Joanna Russ)의 The Female Man (여성 남자)이다. 우리는, 예를 들면 그 등장 인물 질의 순수하게 남성의 모양을 한 기계를 가지고 하는 삽입성교에 대한 루스의 개념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성적 경계가 모호한 인터넷의 대화방이나 사적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양의 사이버 섹스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지구 전역의 동성 또는 이성인 남녀들이, 개방된 공간 속에서 "사이버섹스 하실래요?" 라고 붇거나, 자신이 전자우편 연애 관계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로저 바딤의 1967년에 나온 SF 영화 Barbarella 에서 실현되었다. 더욱이 파편화된 정체성, HIV, AIDS바이러스 등으로 혼돈에 빠진 문화에서 위생적인 테크노 성교 보다 더 자극적이고 도착적으로 발달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헤러웨이와 내가 인터넷의 성해방 가능성을 확신하여, 여성을 '집적 회로'로 통합하고 접목하는 것을 환영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예고한 바와 같이 그 자체로 성평등에 있어서 해방적이거나 유용한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테크놀로지와 인터넷은 성평등에 있어서 현저히 가치있는 진보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착취와 새로이 강화된 성역할이 현재와 미래에 존재함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헤러웨이는 사이보그를 양성성, 전오이디푸스적 공생과 소외되지 않은 노동과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부분들의 모든 권력이 좀더 높은 차원으로 통합되는 데 최종적으로 사용될 유기체적 개체에 대한 유혹인 `포스트 젠더' 시대의 창조물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미래의 육체'에 대한 라이프 잡지의 삽화로부터 도출된 이미지들을 생각해보자. ("대체할 수 있는 당신", 신체 부분들을 대체해 만든 혼합물, "내일의 비젼" (1987, 2월호)의 특별 기고 부분 중). 그리고 헨리 그로스킨스키의 사진들과 발사모의 『성별화된 육체의 테크놀러지』에 나오는, "Sears Health Care Specialog" 에서 판매하는 유방을 절제한 사람들을 위한 장치에 대한 삽화들을 보자. 인공유방 이식 조직이 현재 유용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라이프 잡지의 "미래의 육체" 목록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인공 고환은 엄연히 올라 있는 반면에 말이다. 이것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사모의 설명을 살펴보자. 라이프 잡지에서, 기사에서는 완곡하게 언급되었지만 사진으로는 나타나지 않은 여성육체 는 인공자궁 발달에 대한 참고 자료들을 통해 의미를 드러낸다. 여성 육체와 자궁 혹은 질과의 이러한 관계는 근본적으로 재생산과 관련된 육체로서의 여성 육체라는 지배적인 문화적 정의를 드러낸다. 이러한 환유적인 관계는 순수한 것이 아니다. 이 미래의 비젼에서 남성 육체는 온전한 몸을 지닌 개인이라는 기호로 표시되지만, 여성 육체는 인공자궁으로서만 표시된다. 미래에서 여성이 차지하게될 가상의 위치에 대하여 불길한 경고를 던지고 있다. (6~9) 발사모는 하이테크놀로지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약간은 좀더 부정적인 (그리고 현재로서는 좀더 현실적인) 관점을 가지고서, 기술적으로 육체 재구성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육체는 결정적으로 자연적인 것, 성적인 것, 재생산적인 것으로서의 문화적 기호로 코드화된다고 덧붙였다. 자궁은, 예컨대, 본질주의적인 모성적 육체로서의 여성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여성의 젠더를 강조하는 데에서 계속 드러난다. 발사모의 주요한 관심은 사이보그 육체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헤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그녀는 사이보그 육체가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육체라는 데 있어 헤러웨이에 동의한다. 그녀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 육체와 기술과의 혼성 교배인 사이보그는 "인간 정체성의 외연적 안정성에 도전"하는 낯선 `타자'로 표현된다. "사이보그는 특히 포스트모던의 적절한 상징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사이보그 정체성은 이탈된 경계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타자성의 급진적인 붕괴를 통해 형성되면서, 사이보그 정체성은 타자성이 구성되는 측면을 전면화 시켰다. 포스트모던 문화와 논쟁의 이론적, 실천적 쟁점을 특징짓는 것은 분명히 이 '타자성'이다. 안드레아스 후이센과 다른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타자성'의 존재는 근대적 기획의 핵심이다. 발사모에 따르면, 정체성과 관련된 육체와 젠더의 의미가 본래적으로 자연스럽게 구성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육체가 물질계의 유일한 문제란 의미는 아니다. 기계와 인간 삶의 융합, 그리고 이 시대 여성들의 점진적인 성장, 기술적 작업은 예컨데 젠더화된 육체가 강제적인 지식의 장치라는 신화를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과학, 의학, 테크놀로지의 영역에서 말이다. 궁극적으로 정신은 테크놀러지의 우연적인 현존에 의해 성 역할이 재구성되고 재코드화된 것이다. 이것은 그 창조자가 결코 본래적으로 주변화된 자들의 해방을 고조시키는 근원으로서 기술상 진보와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 우연적인 것이다. "사이보그 육체는 젠더화된 육화의 새로운 형성가능성을 이슈로 제기하고 있다"고 발사모는 주장한다. 이들 재구성된 육체는 물리적인 젠더 아이텐티티가 천부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발사모는 다른 사람들 처럼 포스트모던 육체가 완전히 '비물질적(nonmaterial)'이라고 장담하지는 않는다. "육체에 대한 페미니즘적 접근이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에 의해 제기될 육체의 해체와 탈물질화에 저항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발사모는,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육체와 사회적 질서사이의 관계에 대한 담론은 젠더, 특히, 젠더화되는 육체에 대한 숙고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육체의 소멸이 이론상에서 공표되었지만, 물질적 육체는 그것을 억압하려는 모든 시도를 뒤엎으며 되돌아온다. 모든 다양한 페미니즘들에 있어서, 물질적 육체는 실질적인 장으로 남는다." 라고 쓰고 있다. 젠더화된 육체의 테크놀로지에 있어서, 발사모는 역시, 사이버 공간에서의 가상육체에 대해 언급한다. 그녀는 주장하기를, 사이버 공간은 육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아닐 뿐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의 육체의 사라짐은, 역설적이게도, 육체에 대한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제약을 통하여 달성된다고 한다. 가상현실에 대하여 가장 자주 반복되는 주장 중 하나는, 그것이 육체에 기반한 현실적 (real) 정체성의 결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적인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기술적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육체가 드러나지 않는 환경, 젠더와 인종의 물질적 육화에서 탈피한 공간 등등 가상 현실의 생생한 경험들을 분석하면서, 나는 이러한 육체에 대한 개념적 부정이 물리적인 육체에 대한 물질적인 억압으로 달성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이버 공간의 현상적인 경험은 물리적 육체에 대한 의도적인 억압에 의존하고 사실상 그것을 요구한다.(123) 예컨대 가상현실에서, 육체적 정체성을 억압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구성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재코드화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발사모는 주장한다. 그녀는 가상공간에 대한 이론적 담론에서 , 여성과 남성은 이상적인 육체를 약속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육체의 타입이나 그들이 이미 육화시킨, 본질적인 의미의 관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사람들이 육체를 다시 구성하는 데, 어떠한 불편함도 지출도 없이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떤 종류의 육체 구성을 그들은 선택하게 될까? 발사모는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우리가 성형수술이나 보디빌딩 같은 육체 재구성 프로그램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을 보면, 우리는 그들의 재구성된 육체가 미, 힘, 섹슈얼러티의 매우 전형적인 젠더와 인종의 표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게된다. 재구성된 육체가 문화적 정체성의 재구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128) 헤러웨이가 단언했듯이, 육체의 확장을 단순히 억압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으면서 이미 문화적으로 구축된 육체적 젠더 개념을 바꾸어 내는 데에 해답이 있을 수 있다. 로시 브라이어티 역시 사이버 공간 안에서 젠더와 육체의 결핍된 조건들을 평가한다. 나는 특히 이 분명히 '새로운' 기술적 산물 안에서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는 여성에 관한 포르노적이고 폭력적이고 모멸적인 이미지들이 지속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가상 강간과 가상 살인을 허용하는 프로그램이 디자인된다는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핵심적인 문제는 남아있다. 가상현실과 사이버공간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줄 평등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이 새로운 테크놀러지 분야는 젠더 간의 간극을 심화시키고 성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 같아 보인다. (10) 그러나 브라이도티도 인식의 재구성에 이러한 테크놀로지가 이용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헤러웨이나 발사모에 동의한다. 브라이도티는 여성에게 남아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우리의 집단적인 상상력을 남근과 그에 딸린 가치들-돈, 배제, 지배, 민족주의, 우상화된 여성성, 체계화된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이러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1) 최근에 젠더의 구성을 재구조화 하는데에 있어서 언급되는 도구들은, 공상과학 소설, 테크노 판타지, 사이버 펑크, 컴퓨터 가상현실 장치등이다. "페미니즘적 사이보그 이야기는 지배와 통제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의사소통과 정보를 재코드화해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 고 헤러웨이는 이야기한다. 불행히도, 그러한 작품들은 종종 특징적으로 일반적인 모티프로 여성의 육체를 성별화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상적인 남성 청중의 하나-의 프랑스어 능력을 돕기위해 유혹하듯 아양떠는 매력적인 프랑스 아가씨가 등장한다. 발사모는 이에서 더 나아가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가상현실 구조에서, 사이버 영웅들은 대체로 남성이고, 그들의 인종적 정체성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문맥상 백인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상대역은 보통 아름답고, 섹시하고 때로는 폭력적이고 강력한 여성이다. 사이버 공간은 백인 남성에게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은둔처를 제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이버 공간이 역사적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을 여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젠더화되고 인종이 표시되는 몸이라는 관습적 기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기술적인 다른 하나의 장소로 기능하게 될 것 같다. 그러므로 가상 현실 기술이 육체에 기반한 정체성의 구성과 수행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정체성은 더욱 편리하게 더욱 자주 재생산되는 것을 계속할 것 같다. (130~131) 이것이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가 직면한 있는 그대로의, 불안스러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인터넷 안에는 페페미니스트 공상 과학물과 더불어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에 유리하게 고도로 접근가능한 배출구를 제공하는 많은 사이트들이 있다. 내가 발견한 페미니스트 사이트는, 격주로 나오는 사이버 연재 만화『사이버걸의 모험』(The advantures of Cyber Grrl )이다. 그 만화의 두드러진 캐릭터는, 그들 자신이 남성 의사들에 의해 수행되는 기술-의학 실험의 (아마도 우연한) 희생자들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여성들이다. (그 남성 의사들은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정상적이라고 축측되는 의사들인데, X-공간이라는 가상 공간으로 그녀들을 몰고간다.) 그녀들의 '정신'과 그녀들의 조합된 '뇌파장'을 이용하여 여성캐릭터들은 `反물질에서 탈주한 불질'("matter out of antimatter")를 구성하고 '중심'이라고 불리는 거주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중심'에서 그들은 그들을 추방한 '주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이제까지 만화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유일한 남성 인물은, 추방당한 사이버걸인 동생을 찾고 있는 조를 돕는, 잭 또는 "The Jokester"라는 이름의 젊은 컴퓨터 해커이다. 동시에 잭은 기술-의학 실험 배후에 있는 고도 보안장치를 알아내기 위하여 노력한다. `사이보그화'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또 다른 반응은 다양한 포럼이나 페미니즘을 제공하는 사이버 공간 상에서의 전자출판에 관한 사이트들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이트중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것이 `사이버 페미니즘'인데, 이것은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인터넷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지닌다는 점에서 전통적 페미니즘 사상과 구별된다. 사이버 페미니스트인 사디 플란트(Sadie Plant)는, 인터넷은 "순수하게 여성의 테크놀로지"이며,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과, 위계의 축소, 가상공동체의 양육적인 측면과 그 기술에 대한 적절한 통제의 불가능성을 들어 전통적인 남성 통제가 소멸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가부장제의 표상적인 죽음을 주장한다. 각주 반적으로 사이버 페미니스트는 전통적인 페미니스트의 복제판이 아니라 다른 전제들에 의해 행동한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페미니즘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젠더가 덜 중요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은 여전히 성차별적 환경이며 기본적으로 그 안에서 투쟁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버 페미니즘은 좀더 낙관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그리고 사이버 페미니즘은 전형적으로 인터넷에서부터 파생된 긍정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다. 사이버 페미니스트 사디 플란트에 의하면 인터넷은 순전히 여성적인 테크놀로지이다. 우선 인터넷의 가치-정보의 자유로운 교환, 위계의 축소, 가상공동체의 양육적 측면-은 여성적 가치이다. 둘째로, 네트워킹 테크놀로지는 테크놀로지가 통제를 벗어나고 있으며, 전통적인 남성의 통제양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인터넷이 나타내는 바는 가부장제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밖에도 많은 여성 사이트들과 전자잡지들이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예컨대 Feminista!-페미니스트 전자저널-와 같이 말이다. 페미니스트 온라인 저널, 페미니스트 공상 과학 소설, 그리고 유토피아 사이트 등 이러한 사이트들이 간단한 `넷 서치'를 통해 접근가능하고 이용 가능하다. 앤 발사모는 도나 헤러웨이의 테크놀로지를 통한 젠더와 정체성의 재구성이라는 개념에 동의하면서도 , 페미니스트들이 직면한 현재의 위기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강화된 시각 테크놀로지는 물질적인 육체를 독립된 개체로 생각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육체의 외면과 내면, 표면과 깊이, 아우라와 현상을 구별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가상 육체가 정보와 부호들의 매체로 전개됨에 따라, 독립된 물리적 실체로서의 물질적 육체의 구조적 통합은 기술적으로 파괴된다.(131) 헤러웨이의 논문들이 원래는 정보와 통신시스템의 기술적 장치들 사이의 부자연스러운 접합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발사모는 그녀의 연구에서 가상공간을 통한 사이보그의 출현과 인체 공학, 성형수술, 로봇공학, 보디빌딩, 그리고 다른 여러 발명품들에 의한 물리적 육체의 재구성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두 이론가 모두 근접한 미래에 젠더를 위치시키는 데는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현재의 기술진보가 여성들과 성평등에 있어서 전략적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 가상공간이 새로운 정보환경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이 정보를 어떠한 방식으로 사 용할 것이라는 것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신기술들은 성별과 인종이 낙인찍힌 육체에 관한 낡고 전통적인 서사들을 이야기하는데 이용될 것 같이 보인다. (발사모 132) 그러나 성별, 인종, 민족의 해방과 해체는 우선 의식속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의 지배적인 시스템 속의 지식과 신념은 제고되어야 한다. 전복시키고 이어 그 질서를 재건시켜야 할 것은 문화적 현실이란 희미해진 개념 속의 정신과 상상력 그리고 신념과 정보에 대한 신중한 인식이다. 본질적으로, 다층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사회-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창조적 기반들을 재인식하고 희망적으로 재정의 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변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아마도 서서히 전진하는 우리의 운동에 정당한 수단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해방은 억압과 가능성에 대해 상상적으로 이해하고 의식을 건설하는데 달려있다."(148)고 헤러웨이는 말한다. 한 여자친구에게 보낸 전자 우편에서, 나는 무작정 성평등과 관련하여 기억하고 있던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내 흔들리는 지하 감옥』("My Dungeon Shook")에 대해 썼다. 인종 평등에 대한 짧막한 서간체의 문장에서 볼드윈은 그의 어린 조카에게 흑인이 자유로워지려면 백인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타이른다. 정말 어려운 일은, 얘야,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그것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결백한 사람들은 다른 아무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상 그 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역사의 덫에 여전히 걸려있고,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단다..... 그들이 자유로워지기 전까지는 우리도 자유로워질 수 없단다. 나는 나의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만일 여성이 해방된다면 남성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 이다. -이타주의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나의 페미니스트적 면모를 드러낼 수있도록 성역할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그들이 배워온 틀에 끼워맞춰질 필요가 없다. 거대한 형태로서의 역사는 인식의 작은 체계들, 작은 역사들로 재사고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사이버네틱 정체성의 무대에서 정보와 지식의 물리적 몸체를 사고함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존재하는 이항 대립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소설과 상상력이 변화하고 과거의 체계가 재구조화될 때 종종 그것들은 이미 있는 이야기들을 역전된 버전으로 다시쓰는 형태를 취한다. 즉 당연시되는 정체성들의 위계를 뒤집는 것이다. 옛날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사이보그 저자들은 서구 문명의 핵심적인 기원 신화를 전복시킨다. 쟈넷 윈터슨(Jeannette Winterson)의 Sexing the Cherry 는 동화의 구조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전복되고 다시 쓰여진, 그리고 일반적이 성역할이 해체된 대표적인 예이다. 『Teledildonics: 쟈넷 윈터슨의 가상 레즈비언 픽션』에서 작가인 리사 무어(Lisa Moore)는 경험주의와 식민지 착취 안에서 유럽 모더니티의 기원을 재구술하고, 통합된 자아라는 계몽주의적 근대의 개념에서 복수적 주관성과 해체된 정체성의 탈근대의 예언에 대하여 연구한다. 조단(Joardan)의 서사를 통하여,-그는 근대초기의 식민지 수탈과 과학적 발견과정에서의 영웅들을 조수로서 따라다닌다.-, 이러한 근대의 기술들이 문제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그것들의 허위와 한계를 폭로한다. 그럼으로써 모더니티 그 자체 - 주체, 독립된 신체, 고정된 정체성- 는 인간경험을 기술하는 다양한 방법들 중의 하나로서 다시 쓰여진다. 그리고 파편화된 육체와 복수적인 주관성에 대한 탈근대적 이해는 계몽주의적 근대성을 거부하거나 그에 도전함으로써가 아니라 계몽주의적 근대성 자체 내의 불가능한 요구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한 이해는 고정되고 인식가능한 젠더와 성정체성에 대한 근대적 투자를 해체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젠더와 성정체성들 사이를 이동하며 또는 때로는 간단히 그것들을 초월한다. 글을 맺으면서, 기술, 통신, 정보에 의해 인식과 상상력이 새로운 모양을 갖게 됨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여성과 남성이 사이버 공간안에 들어갈 때 그들이 자동적으로 젠더에 중립적인 유기체(또는 사이보그)로 재프로그램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질(Jael)의 대량학살에 대한 비젼 속 남성의 죽음이나, 조안나 루스(Joanna Russ)의 소설 the female man에서 나오는 남성 종자의 원천적 대체 등을 이야기 할 때는, 불필요한 남성 상징- 남근주의적 집합체와 과거와 현재에 지속되는 지배와 통제 체계의 원형-의 죽음만을 원하는 것이다. 이 남자는 긍적적이고 확실하게 죽어야 하고 그의 인식과 정보의 거대한 몸체는 인류의 모든 인종과 성별로 균등하게 해체되어야 한다. 난 살인을 했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I am not guilty because I murde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