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6 번 글: 존재를 존재로...--멀리 있는 후배에게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3년 04월 03일 09시 26분 |
읽은수: 5502 |
너의 이메일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날 하루종일 행복했다.
며칠 전에 선배 언니 집에 가서 잤는데--학교 졸업 이후 나의 만성적인 '여자 기근' 현상을 해소하고자 나는 열심히 여자들과 사귄다--그녀는 평상시의 지겨움과 귀찮음 증상이 도져서 급기야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빌려준 "간디 자서전"을 읽고 있었는데 간디가 오만하고 편협한 인간이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언젠가 동사시아의 근대사에 대한 논문집에서 간디가 선지자로서의 역할에 굉장히 몰입해 있으며 그것이 인도 중부 지역의 중간 카스트가 오랜 세월 자존심을 지켜온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얼른 그것이 기억나더라. 그래, 그런 사람이면 편협하고 오만한 면도 있겠지...
아이를 가지는 것 외의 성은 불결한 것이고 여성을 도구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욕을 결심했다는 그의 말은 과연 자기 욕망과 제대로 화해하지 못한 사람의 소아병적인 신경질처럼 느껴지더라. 그래, 그렇게 자기를 꾹꾹 눌러야 세상을 반듯하게 이끌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그 무엇이 그에게 있었겠지. 또, 그가 오랜 세월 영국을 "착취자"가 아닌 "협조자"로 만들 수 있었다고 믿은 것도 그가 카스트적인 한계 안에서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언니의 말을 듣고 문득 나 자신을 들여다보니 내게 간디는 더이상 영화 속에 나타나 나를 울리던 그런 "위인"은 아니더구나. 그러나 나는 생각했어. 그가 편협하고 오만하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그가 수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게 무엇이었을까, 뭘까. 그는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맥락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았을까. 그를 오만하고 편협한 노인이면서 독립운동가이고 물레질 하는 노인인 채로, 살아있는 존재 전체로 복원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존재를 존재로. 존재를 존재로...
그 집에서 잠시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훑어보았다. 예의 선배언니는 홍세화가 사사건건 프랑스를 이상화시키는 것이 못 마땅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그리 오래 한국을 떠나 있던 사람이 왜 그토록 중요한 여론 선도자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여론 선도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끝났다고.
그래,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한 번도 제대로 말해 본 적이 없지만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읽었을 때, 글이 두서없고 앞뒤가 연결이 잘 안 된다고는 나도 생각했었다. 그리고 홍세화가 대우차 노조에서 김우중 체포단을 프랑스에 보낸 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도 들어. 선배언니 말처럼 그 체포단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을 줄 알면서) 뭔가 한다는 걸 한국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라. 나는 김우중을 잡는다고 프랑스에 가기보다는 김우중이 빼돌린 돈을 추적해서 차곡차곡 원래 그것이 있었어야 할 회사로 가져오고 김우중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 한 결코 귀국할 수 없도록 방도를 만드는 현실적인 방안을 고민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해.
그래, 나는 욕 먹을까봐 두려워서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도 홍세화를 비판하지 못하고 대우차 노조도 비판하지 못해. 그 언니처럼 용감하지 못해.
하지만, 다시 홍세화로 돌아가서, 그가 하는 말이 다 맞지 않더라도 나는 상처받은 그의 내면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한 번 들어보고 싶어. 그 말이 앞뒤가 잘 맞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히는 순간을 포함해서, 그 말을 하나의 온전한 무엇으로 복원시키고 싶어.
휩쓸린다는 것이 아니라, 마구 추종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려내는 것.
살아 있는 것을 살게 하는 것. 내가 마구 기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거기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삶에 그 정도 마술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지 않겠어?
봄이다. 네가 곁에 있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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