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1 번 글: 어머니, 나의 어머니 3 |
| 글쓴이: 이민화 |
글쓴날: 2002년 12월 23일 12시 46분 |
읽은수: 4436 |
토요일 저녁,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서 어머니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다. 아니, 저녁을 먹는 사람은
나 뿐이고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을 잔뜩 담은 표정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나를 쳐다보고 있다. 엄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식구들더러는 제 때 밥을 안 먹는다고 야단치면서 자기는 집안에 남아 있는
떡이나 과자 등을 아무 때나 배고플 때 먹고는 밥 앞에서는 딴 생각을 한다.
“민화야.”
“어, 엄마.”
“난 말야, 20대에는 아무하고나 대충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정말? 대단히 용감했었군.”
“그래서……,”
엄마는 쑥스러워졌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하고 시간을 끈다. 나는 짐짓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요즘에야 알 것 같아. 내가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았겠는지……. 음, 20대에는, 그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 ……, 지금, 결혼하라고 하면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잘 알 텐데.”
엄마는 스물 여섯에 결혼했다. 엄마는 내 나이에 이미 아이가 둘이었다, 세 살인 나와 돌이 안 된
동생. 자신이 서기 전에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나는 가끔 그걸 떠올리면 놀랍다. 겁 많고
신경과민이었던 젊은 시절의 엄마는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오후에 흰 액체 위장약을 혼자
꺼내 먹곤 했었다. 그 시절 나는 엄마란 다 오후에 위장약을 꺼내먹는 사람들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그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나는 문득 지하철 역이나 버스 안에서 알 것도 같다. 아이
키우는 일은 거의 전담하다시피 한 엄마는 때로 우리 둘을 앞에 두고 막막했구나. 젊은 시절
아버지는 거의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일주일에 절반쯤은 우리 말고는 아무하고도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내기도 했겠구나. 그래서 엄마는 마음인지 몸인지 알 수 없는 어딘가가 늘
그렇게 피곤했구나. 그 적막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루에 두 번씩 쓸고 닦고 청소를 했구나. 자기가
일을 열심히 안 해서 이렇게 마음이 비틀거리는가 해서 그렇게 일본 뜨개질 잡지를 구해서 코바늘로
레이스를 뜨고 털실로 우리 옷을 만들었구나. 엄마는 너무나 바보라 자기가 외로운 줄도 몰랐구나.
“땡, 기회를 놓쳐서 안 되었군요. 이제사 그걸 알다니. 흐흐흐. 그래 엄마 이상형이 뭔데?”
“어…….”
“궁금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봐.”
“돈 좀 있고 스마트한 사람.”
“스마트”라니! 내게 그건 채만식의 『삼대』에 나오는 “모던 보이” 이후 최고로 구식 표현이다.
“스마트”라고 하면 내겐 적당히 교양서적을 많이 읽고 회사에서 그럴 듯한 기안을 내며 여자와
함께 있을 때면 느끼한 표정을 하고 자리를 양보하거나 자신에게 의논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듯한 태도를 취하는 남자가 떠오른다. 하지만 아마도 그건 “과격한” 페미니스트인 내가
“스마트”라는 말에 대해 가진 편견일 것이다.
“하하하. 그럴 수 있지. 중요한 이야기네. 돈 좀 있고 스마트하면 좋지.”
엄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은 여고생처럼 쑥스러운 듯이 웃고 있다.
“그렇군. 그래 돈 좀 있고 스마트한 거 말고 딴 거는 필요 없는 거야?”
“음, 그러니까, 그게……, 그런데, 돈 좀 있고 스마트 하다 그러면 거기 다 포함되지 않나?”
“그러고 보면, 돈……, 스마트라, ……,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나 과연 아버지가, 하하하. 그랬단
말이지?”
그래, 돈이 좀 있으면 만삭인데도 한겨울 2시나 3시에 깨어 연탄을 갈지 않아도 되었겠지. 그 시간에
자기가 먼저 나서서 남편을 깨우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속으로만, “이 집 남자들은 이렇단 말이지.”
하고 중얼중얼, “아, 다만, 지금 이 한 달만이라도…….”하고 속으로만 중얼중얼, 여자는 먼저 무엇을
해 내라고 하는 법이 아니므로, 엄마는 젊은 날을 중얼중얼로 보냈지. 그래, 돈이 좀 있었으면 그렇게
중얼중얼하지 않아도 되었을 지도 모르지. 귀족이나 부르주아들만이 등장하는 시대배경도 모호한
연애소설에선 만삭인 아내가 혼자 깨어 잘 떨어지지 않는 연탄을 칼로 떼어내는 일 따위는 없지.
귀공자처럼 생긴 남자는 늘 미리 알아서 제복 입은 하녀를 대기시켜 놓지. 엄마는 돈이 좀 있어서
여자가 소리 높여 무엇을 요구하지 않아도 미리 알아 아무런 험한 일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는
그런 남자를 꿈꾸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아직도 그 꿈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지. 어느 날까지
7남매의 막내이다가 어느날부터 갑자기 이삿짐 센터 아저씨와 싸워야 하고, 연탄배달 아저씨와
연탄 갯수 한두개로 싸워야 하고, 외국 간 사이 전세로 준 집의 임차인과 싸워야 하고, 커튼업자와
싸워야 하고, 아, 돈이 좀 있었으면 이 지겨운 싸움을 면할 텐데, 하고 늘 엄마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생활비는 일주일치씩 찰랑거리게 주면서 다른 사람과 싸울 만한 일이 있을 때에는 늘
부재하는 아버지가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하고도 대거리를 하기 싫어하는 아버지는 그 전날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던 사람을 만나도 언성을 높이거나 항의하는 법이 없었으니.
“아이구, 이 양반아, 그럼 결혼은 차치하고 20대에 연애라도 좀 하지 그랬어.”
60년대에 대구 출신의 아가씨가 연애하는 것이 쉬웠으리라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냥, 결혼하기 전에,
세상이 어떤가라도 한 번 보지 그랬어, 한 번 말해 주고 싶다. 여자 친구들과 어디 가서 하루 자고 온
것만으로도 열흘을 딸에게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엄마에게 그게 가능했으리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한 번 말을 해 본다. 엄마니까 당연히
당신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욕망도 없으리라고 미리 짐작하고 있지는 않다고, 나는 당신이 남편을
조금쯤 못 마땅해하는 것까지도, 얼마쯤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그냥 그렇게 툭 한 마디
내뱉는다. 나는 적어도 어머니는 이래야 하고, 뭐든 참아야 하고, 자기 욕망은 밀쳐내야 한다고
믿지는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다.
“흥, 무시하지 마. 내가 연애를 했는지 안 했는지 네가 어떻게 아니?”
그래, 우리 엄마, 순발력 하나는 끝내주시지. 어찌나 재깍재깍 잘 받아치시는지. 그래, 마음 대로 해.
엄마가 그렇다고 하면 연애를 했다고 인정해 줄게. 그렇게 연애까지 해 본 사람이 연애의 시작은 곧
성생활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서 딸을 그렇게 들들 볶고 어디 여행 한 번 못 가게 했다는 걸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말해서 그게 엄마한테 장난이 된다면 그래, 그렇게 말 해. 연애를 한 게 아니라, 꿈을
꾸었겠지. 병약한 외할머니를 대신해서 학교만 파하면 집에 돌아와 저녁을 하고, 수업이 없는 날이면
라디오 클래식 채널을 틀어놓고 오전을 보낸 그 대학시절 내, 아, 결혼하면, 뭔가 삶이 덜 음침하지
않을까 하고 꿈을 꾸었겠지. 꿈만 꾸었겠지. 정말로 연애를 해 본 사람이 스무 살이 되도록 사고 한
번 친 적 없는 딸을 그렇게 죽자 살자 들들 볶았을 리가 없어. 술 마시면 시집 못 간다. 연애 해 본
여자는 시집 못 간다. 그렇게 낮이고 밤이고 읊어댔을 리가 없어.
맙소사 우리 엄마, 내가 연애가 두어 번 깨지고 나서도 멀쩡하게 나가서 잘 살고 있으니까, 이제
와서, ‘나도 연애 한 번 해 볼 걸.’하고 있는 거야? 사람이 어떻게 그러니, 이 바보야. 사람이
어떻게 그러니. 그럴 거면 그 때 왜 그랬어. 왜 사람을 그렇게 괴롭혔어. 왜 그랬어. 엄마 말 안
들으면 내가 이름도 없는 저기 어디 먼 곳에서 평생 연탄만 갈면서 살 것 같아서 그랬어? 엄마 말 안
들으면 내가 이름도 없는 저기 어디, 엄마가 찾아올 수도 없는 먼 곳에서 하루 종일 적막 속에
유배될까 봐 그랬어? 엄마 말 안 들으면 내가 30대를 위장약에 의지해서 살 것 같아서 그랬어? 돈
좀 있고 “스마트”한 남자에게 날 얹어 놓아야 내가 “편안하게” 살 것 같아서 그랬어?
“뭐, 언제는 안 해 본 척 하더니, 뭐, 해 봤음 다행이구. 잘 했어. 그래.”
아, 엄마, 엄마 맞아? 나한테 와서 그렇게 기대기만 하는 엄마, 정말 엄마 맞아? 내가 힘이 있거나
없거나 와서는 그렇게 응석만 부리는 게 엄마 맞아?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뭔지는 하나도 모르면서
계속 날 가지고 옛날 꿈만 꾸는 사람이 엄마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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