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4 번 글: 여자 회사원, 책과의 실연을 기억하다 -- 3 |
| 글쓴이: 이은숙 |
글쓴날: 2002년 10월 13일 23시 33분 |
읽은수: 2654 |
내가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케케묵은 유년기 때문도 아니고 남자 때문도 아닌지도
모른다. 1학년 2학기, 무슨 소리를 해도 내가 계속 7시에 나가서 10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하자
어머니는 비열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정조관념을 들먹였고--도대체 매일 같이 이 시간까지
남자들과 무얼 하는 건지--나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빌미로 남자들과는 전화도 하지 말고, 세미나도
하지 말고, 따로 만나지도 말고, 술도 마시지 말라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인생이 파멸할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때는 거의 매일 같이 반복되는 그런 말을 견딜 힘이 내게 없었다.
그 말을 몇 달 듣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니, 책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내게 힘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시민사회도, 노동운동도, 반제국주의도, 어느
누구도 뚱딴지 같은 정조관념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으니까. 세상 어느 누구도 내게 가해진
폭력을 폭력이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혼자 있었다. 내가 매일 가족으로부터
감시당한다는 느낌 속에서 살아가는데 『중세의 가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때 어머니가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돈을 벌고 독립하는 일을 또 다시 잊어버리고
서양사학과나 국사학과나, 사회학과나 인류학과에 겁도 없이 편입해 버렸을 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미쳐 있으면 현실적으로 자기자신에게 무엇이 유리한지를 잊게 되니까. 그랬으면 그 역시 나름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지. 어쨌든 그랬다면 나는 덜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고--교수나 남자
선후배들이 나를 무시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나의 어머니만큼 내게 영향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더 비현실적이었을 것이고, 더 가난했을 것이고, 더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그래도 과거는, 과거지. 삶이란 어차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니까.
서점이다. 책장 저 윗칸에 "상처와 응시, 박혜경"이라고 쓰여 있다. 언젠가 세미나를 할 때에 그의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손을 뻗는다. 나는 키가 작고, 책이 닿을까, 닿을까. 책을 건드려서 툭
떨어뜨려 받는다.
계산하고, 서점을 나선다. 책을 사는 일은 즐겁다.
--990217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