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3 번 글: 여자 회사원, 책과의 실연을 기억하다 -- 2 |
| 글쓴이: 이은숙 |
글쓴날: 2002년 10월 13일 23시 32분 |
읽은수: 2507 |
대학에 들어와서 두 번째 학기에 동아시아 근대사 교양수업을 하는 교수는 참고도서의 목록을 한 쪽
가득히 복사해 나누어 주었다. 나는 그 시간에 다시금, 내게 처음으로 역사를 가르친, Krekel과
Medivitz가 돌아온 것만 같았다. 나는 매일 여섯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으며 그 교수가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시키기 전부터 공강시간에 일본근대사나 중국근대사 책을 읽었다. 수업시간 자체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교수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거의 없어서 정작 수업시간에는 종종 졸았다. 그런
날에도 수업이 끝나면 혼자 신이 나서 도서관에 갔다. 나는 박정희가 1920~30년대의 일본
근대화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베껴왔다는 것에 공연히 흥미를 느꼈으며 나달나달해진 일본
근대사 책을 가져다가 의기양양하게 시대순, 분야별로 요약카드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내가 옷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느니 집에 일찍 오지 않는다느니 방을 치우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신경질만 내고 있었지만 그것도 귓등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학력고사에 낭비되었던
시간을 다시 되찾고 싶었다. 되찾아야 했다. 그 학기 내내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있는 동아리의
세미나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매주 소설이나 시집을 한 권씩 읽었으며 엉터리로나마 칸트와
헤겔을 스쳐 지나갈 기회도 있었다. 그것은 연애와도 같았다.
잠시 터미널 곁의 서점에 서서 내가 읽고 싶었으나 읽지 못한 책의 저자들을 되뇌인다. 촘스키, 파농,
레비스트로스, 미드, 박현채, 이이화, 김주연, 김병익, 한승원, 마르크스, 그람시, 루카치, 사이드,
그리고 이름을 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내멋대로 연대의식을 느꼈던, 자기 나름대로 한국 사회를
다시 보고자 했던 수많은 젊은 선배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러다가 연휴 끝에 사무실로 돌아가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텐데.
회사원이 그런 책을 읽는 것이 쓸모가 있든 없든, 나는 자꾸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저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내 머리 속에, 혹은 마음 속에 그들을 불러내서 놀 기회가 있을까. 있을까.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일주일에 다만 얼마라도, 그런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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