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2 번 글: 여자 회사원, 책과의 실연을 기억하다 -- 1 |
| 글쓴이: 이은숙 |
글쓴날: 2002년 10월 13일 23시 31분 |
읽은수: 2463 |
혼잡을 피해 설날 혼자 먼저 귀경한다.
며칠 놀다 보니 긴장이 풀린 탓일까. 성남 버스터미널 근처의 서점이 유난히 눈에 띈다. 아주 큰
서점은 아니지만 적어도 학습지와 고시서적만이 쌓인 곳은 아닌 듯하다. 지난 연말에 내 손에
들어와서 아직도 지갑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도서 상품 권 생각이 난다.
서점에 들어서서 한승원이나 김인숙 등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작가들의 이름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들의 이름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미드의 『세 부족 사회의
성과 기질』이나 『동아시아, 문제와 시각』 따위의 책을 생각한다. 내가 주워 섬기는 책제목에
비해서 내가 읽은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저런 책의 제목을 생각하면 늘 내가
충분히 잘 해주지 못한 옛 애인을 생각하듯이 안타깝고 미진한 느낌이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그런 류의 수학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나머지 과목은 그나마 흥미를 느낄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나는 그저 성적을 잘 받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그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한 학생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문제집과 문제집
사이에서 낭비되는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싶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자유를
준다면 나는 그 시간에 더 많은 양의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노는 데에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놀이인 만큼 책을
읽는 것도 놀이였고, 책을 읽는 것이 '일'인 만큼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쓸모없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에서 내가
내멋대로 했을 경우에 내게 닥칠 수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폭력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폭력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나는 아마 싸우는 데에 시간을 다 허비하고, 정말 내가
싸움을 시작한 목적에 걸맞게 시간을 보낼 여유를 가지지는 못할 터였다. 나는 여자인 내가 공부를
잘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자립할 수도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위인전에 나오는 이순신과는 달랐다. '입신양명'에도 관심이 없었다. 큰 일을 하고, 세상을 혼자
힘으로 바꾸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했다. 다만 남이 알아주는 일을 하든 못하든 '누구
엄마'나 '누구 마누라' 말고 내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아이에게 과외를 시키면서 달달 볶고, 남편의
연봉이나 승진을 가지고 흥분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을 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나는 자기 이름을 못
가졌을 때에도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고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둘 만큼 욕망으로부터 초탈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 것이 있어야 했다. 내 것이 있어야 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4년을 오로지 내 이름을 갖겠다는 일념으로 견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