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3 번 글: 여인열전 3 --ㅇ 언니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10월 07일 22시 56분 |
읽은수: 2725 |
MSN Messenger가 컴퓨터 화면에 뜬다.
"무넝씨."
"언니, 웬 존대말?"
"저 ㄱ 간사인데요. ㅇ 부장한테 핸드폰으로 전화 좀 하세요."
"아, 예."
전화를 돌린다.
"언니, 무넝이예요."
"어, 나 여기 공인회계사회인데 **종금 사업보고서 복사하러 왔다. 96년, 97년, 98년 다 필요하니?"
"음, 뭐, 언니 복사하는 거 많이 힘들지 않으면 다 훑어 보죠 뭐."
"그래 알았어."
ㅇㄴㅇ. 33살. 시민단체 간사.
언니는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너무 어리다 생각해서 우리, 같이 잘 놀지는 않았지. 우리가 둘이 따로 만난 건 3년 전인가 언젠가 주주총회가 늦게 끝나고 언니 방에서 내가 잤던 날 뿐인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때때로 언니 생각을 해. 언니가 한참 어리다고 생각하는 내가 운영위원이고 언니가 간사인 것이 언니한테는 어떤 느낌일까 하고. 언니는 충정로에 있는 공인회계사회에 사업보고서를 복사하러 가고, 나는 앉아서 그걸 받아서는 어설프나마 "재무제표 분석"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사실 뭐, 그런 거 누가 복사하러 가면 어때. 내가 회사에 안 매여 있었으면 내가 갔을 수도 있지. 하지만, 점심 때 수저를 누가 놓는가를 가지고도 위계질서에 예민해지는 사람들과 같은 회사에 다니다보면 언니가 개의하지 않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새삼 생각 나.
물론 언니의 주업무가 복사인 것은 아니지. 오히려 내가 거기 예민해 있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인지도 몰라. 언니에게는 언니의 책임과 권한이 있고, 언니 몫의 기획이 있고, 언니가 맡은 부분에 대해서 운영위원들에게 "숙제"를 나누어 주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얼마쯤 언니 몫이지. 이번 주까지 **종금 사업보고서는 ㄴ언니가 보고, 주식회사 @@@은 내가, 주식회사 ###은 ㅊ이 나누어서 보기로 했잖아. 성명서를 준비하고 보도자료를 내고, 기자회견 준비를 하고, 여기저기 전화해서 이것저것 섭외하는 사람도 언니니까. 그러나 언니, 나는 시시종종 그 자리를 늘 지키고 있는 언니보다 2주마다 한 번씩 가서 어쩌다 주말에 재무제표를 훑어보는 일을 하는 내가 더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만 예민해져. 글쎄, 계정과목은 내가 더 잘 알겠지. 그렇기는 하겠지. 하지만, "전문가," "전문가"라는 그 말이 나는 자꾸만 불편해.
나는 언니에게는 자꾸 엉뚱한 말만 하지. 딴 일로 언니네 사무실에 들렀다가 언니를 보면 이상한 말만 하지.
"언니, 퇴근 안 해요? 역시 새나라의 간사는 바쁘구나."
"갑자기 얘가 무슨 새나라야?"
"아니, 뭐, 새나라 좋잖아."
"너 잘 있었어?"
"응."
나는 "이름을 얻으라," "이름을 얻으라"는 소리를 가족들로부터, 어른들로부터 덜 듣고 자란 여자들이 "이름"에서 더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해. 성차별적인 생각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니보다 어린 운영위원에게 서류까지 챙겨보내주는 걸 개의치 않는 언니를 보고 있으면 나는 역시, 여자들이 이름에서 더 자유롭다고, 여자들은 무엇인가 맡은 일이 있어 그 일만 할 수 있으면 순간순간 누가 더 그럴 듯해 보이든 개의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중얼거리고 있어. 언니는 언니에게 한 자리가 있어, 언니가 **은행 주총 준비를 하는데 꼭 필요한 사람이면, 거기에 언니보다 재무제표를 더 잘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구조조정촉진법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기죽지 않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런 사람들을 늘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다시 MSN messenger가 화면에 뜬다.
"무넝아."
"예."
"내가 1,500원이 모자라서 96년 거는 다 복사 못 했다. 괜찮지?"
"뭐, 그 정도까지는 없어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
"언니, 근데 나 *요일까지 그거 할 자신 없는데. 그 다음주 *요일 날 보고 가면 안 될까?"
"그래. 수고가 많다."
"제 시간에 해 내지도 못하는데 뭐."
문득 언니의 당당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것도 같다. 언니는 이미 스스로 시민단체 **센터의 주인마님이어서 한 발을 빼고 있는 나랑 경쟁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 들어 더 정신 없이 바빠 보이는 언니는 상 차리는 일의 의미를 잘 아는 마님이어서 자기가 잔치집을 지키지 않으면 동네 일손들도 손님들도 잔치를 벌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업무분장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지 않는 이런 사이로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주인 마님인 언니를 앞에 두고, 이 세상에서 어떤 이름도 덧없는 줄을 얼마쯤은 아는 나는, "언니가 건재한 곳에서는 나도 건재할 것 같아. 그럴 것 같아." 하고 소리 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언니가 씩씩하고 경쾌할 수 있는 곳에서 나도 건강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무슨 차를 사고, 몇 평 짜리 집을 사고, 어디 스키를 타러 가고, 언제 골프를 시작하는가만이 이야기거리가 되는 이 쓸쓸한 세상에서, 언니가 그런 골치 아픈 소리에 신경쓰지 않을 수 있으면, 나도 까르르까르르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11시, 방에서 컴퓨터를 켰는데 언니가 아직도 MSN messenger에 남아 있다.
"언니, 집에 안 가?"
"어, 30분 뒤에."
"바쁜 모양이군."
"어."
"언니 생일 되면 내가 아로나민 골드 사 주지."
"안 돼. 살 쪄."
"못 살아. ……. 늙어가는 마당에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 들어가셔."
"그래. 잘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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