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번 글: 난다씨와의 대화 -- 생활의 지혜 9. 보일러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07월 22일 00시 57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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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보일러
이난다
추운 겨울 아침, 일어나기 싫을 때, 그때 듣는 보일러 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내가 자는 동안 밤새도록 자기 혼자 돌아갔던 보일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바닥을 울리는, 그 저음을 듣고 있으면, 거대한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게도 아침을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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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넝이
첫 직장에서는 그 사람이 입사한지 몇 년이 되었는가에 따라 일이 배분되었다. 보통 1년차나 2년차가 3~5년차 한 명과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일을 하는데 짝은 항상 바뀌었지지만 짝을 지어 고객회사를 맡아 실무를 하고, 실무가 끝나면 상사에게 실무 검토를 받고 결제를 받는 구도는 늘 같았다. 일은 계절성이 있어서 1월부터 3월까지는 늘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한 사람이 보통 10~15개 회사를 맡았는데 이 회사 저 회사에서 급하다고 자기 일을 빨리 해 내라고 전화를 할 때면 자기가 사람인지 자동응답기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2월 하순부터 3월 말까지는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하루에 10시간이고 12시간이고 계속 일을 해도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덧 나는 그 회사에서 3년차가 되었다. 내가 1년차일 때 고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터라 되도록이면 나와 짝 지어진 1년차나 2년 차가 되도록이면 나 때문에 당황하거나 쩔쩔매지는 않게 하려고 애썼다. 1~2년차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특히 2년차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남자들이 주류였지만 되도록이면 내 일을 그들에게 넘기고 나 먼저 집에 가 버리지는 않으려고 했다. 그들이 혼란스럽거나 당혹스러운 일이 있으면 내가 살피려고 했다. 회사의 업무처리 방침도 1~2년차가 한 일은 그 위의 상사에게 넘기기 전에 3년차 이상이 모두 꼼꼼하게 검토를 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나는 그네들이 한 일을 놓치지 않고 살펴보려고 눈에다 힘을 잔뜩 주고 서류를 들여다 보고 있곤 했다. 거기에는 “여자들은 힘들면 피해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같은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나이도 어린 여자 고참이 그야말로 너무나 단순한 일을 시키거나 하면 다소간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떨 때는 '내가 맡긴 일을 왜 제 때 해 주지 않는가'에 짜증이 나서 술을 마시고 1~2년차에게 투덜투덜거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2년차들과 나는 조금씩 조금씩 서로 익숙해졌다. 내가 고객 회사의 나이 많은 아저씨 아줌마 담당자들 앞에서 당황하면 그들이 도와주고, 고객 앞에서 내가 대단히 유능하다고 일부러 과장 섞인 칭찬을 해 주고, 내가 정신 없어 하면 1년차가 한 일을 나 대신 검토해 주고.
그 해 3월 하순에 접어들고 우리 부서 사원들은 밤 12시나 1시에 회사에서 탄 간식비로 3분 라면이나 귤, 과자를 사서 회의실에 모여 먹으면서 멍한 머리로 초등학생 수준의 농담을 주고 받으며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키들키들 불안한 웃음을 웃곤 했다. 내심 자기가 한 일이 정확한 지 나중에 고객이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지 않을지 걱정들을 하면서.
3월 25일께였다. 3월 말까지 모두 일을 끝내야 하는데 주말까지 나와서 매일 12시간씩 해도 끝낼 수 없는 분량이 남았다. 나는 거의 머리칼을 쥐어 뜯어야 할 지경이었다.
“정 선생님, 이거 그냥 선생님이 검토했다고 하고, 보지 말고 매니저 선생님 책상 위에다 갖다 놓으세요.”
“믿어도 되는 거지요?”
“걱정 마세요. 틀린 것 없어요.”
그래서 ㄱ 선생 덕으로 한 건을 넘겼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한 건만이 아니었다.
“ㄴ 선생님, 이것 좀 같이 합시다. 나 혼자 다 볼 수가 없어요. 지금 자정이니까 각자 하던 거 끝내고 2시부터 회의실에 가서 봅시다.”
둘 다 눈이 반쯤 감긴 채였다.
“이것만 끝나면 봐 드릴께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는 먼저 회의실에 가서 항목 몇 개를 살피기 시작했지만 머리가 멍해서 더 이상 일을 진척시킬 수가 없었다. 2시에 ㄴ선생이 나타나 그날 밤을 뜬 눈으로 버텨 주고 내가 잘못 쓴 부분도 하나 찾아 낸 덕분에 나는 그해 3월을 겨우 넘겼다.
대책 없는 노동 강도에 질려서 그 회사를 그 해 가을에 그만 두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그 회사와는 상관없이 그 해의 ㄱ과 ㄴ과 ㄷ과 ㄹ을 생각하곤 한다. 그들을 생각하면 세상의 감당할 수 없는 급하고 어려운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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