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번 글: 난다씨와의 대화 -- 생활의 지혜 1. 가난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04월 24일 22시 54분 |
읽은수: 6151 |
1. 가난
이난다
가난함에 대항하는 내 무기는 '솔직함'이다.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았는데도, 어렸을 때는 부자가 아닌 것이 부끄러웠다. 부자 친구들과 놀아야 할 때, 나는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부자가 아닌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아직도 나는 친구들을 집에 놀러오지 못하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꿈을 꾼다. 나는 지금 가난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돈이 없다'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그 때마다 나는 '돈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던 내 마음이 조금씩 치료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밥을 사달라고 처음으로 친구에게 부탁해야 했을 때는 굉장히 힘들었다. 돈이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돈이 정말로 없을 때는 그런 말이 잘 안 나온다.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거절당하면 어쩔 것인가? 차라리 처음부터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집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 백 번 낫지 않을까? 구걸은 영혼에 좋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믿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나를 부디 먹여달라고 타인에게 내 양식을 의탁했을 때, 그 사람이 말없이도 내 사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을 때, 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호의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느꼈을 때, 그걸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 마음이 작고 부끄럽고 초라해졌을 때. (0920)
-----------------------------
무넝이
학교를 다니던 기간 중에 신림동에서 방 세 개를 옮겨다니면서 2년 반을 산 적이 있다. 세 집 다 남의 가정집이었다. “남자대학교” 앞에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를 20~25만원 주고 “남자들의 소굴”처럼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사는 것은 그 방법 밖에는 없었어. 현관 옆 방에서도 살았고, 부엌 옆 방에서도 살았고, 집 한가운데 있는 방에서도 살았다. 방의 위치나 주인의 성격에 따라 어떤 집에서의 삶은 그런대로 좋았고 어떤 집에서의 삶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번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는데 너무나 우울해서 안간힘을 써도 짐을 쌀 수가 없었어. 이삿날은 잡아 두었는데 이사를 안 할 수는 없었다. 그 날 부엌 옆 방에 찾아온 두 여자와 세 남자가 기억난다. 한 여자가 나를 끌고 나가 상점이 있는 골목으로 데리고 나가 이사에 필요한 상자를 얻어왔지. 그 여자가 상자에 깨끗한 광고지를 깔고 다른 여자와 앉아 내 옷을 접어 차곡차곡 넣었어. 한 남자는 가전제품의 전선이 덜렁거리지 않게 콘센트를 튼튼한 테이프로 제품 몸체에 붙이고 조립식 옷걸이의 나사를 풀어 해체했어. 한 남자는 책을 노끈으로 묶어 손으로 들어 옮길 수 있게 하고 늦게 온 한 남자와 같이 세 남자가 아래층까지 짐을 날라 작은 트럭에 실어 주었어. 나는 멍하게 짐을 싸는 시늉만 하다가 화장실에서 훌쩍거리고 있었어. 미안한데도 내 마음이 너무 슬퍼서 짐을 쌀 수가 없었어.
사실 그 전 날 나는 내가 부르면 누군가 와 줄까 생각하면서 하나도 자신이 없었는데 내가 아무 힘도 없는 날도 그렇게 이사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내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데도 이사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내가 왜 우울한지 아무도 묻거나 우울해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아서 얼마나 좋았는지. 한 이삿짐 센터에서 오래 함께 일 해온 사이처럼 그 날 그 다섯 명이 손발을 척척 맞춰 짐을 싸고 짐을 나르는 걸 보면 웃음이 좀 나기도 했다.
짐을 다 나르고 나서 애들이 나더러 “거하게” 밥을 사라고 했지. 그럴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아마 수중에 5만원만 더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사를 한 것이 여름이었었던 것 같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팥빙수를 샀던가 그랬는데 그것도 사람 수대로 다 살 수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사실은 애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무척 민망했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할 지 몰라서 엉뚱한 말을 하거나 멍하게 앉아 있었을 거야.
신림동에 살던 시절에는 누군가 일거리를 구해주면 참 좋았어. 그것이 본부에다 과외 아르바이트 신청을 낸 것이 순서가 돌아와서 구해진 아르바이트든 친구가 주선한 것이든 혹은 우연히 걸려든 1회성 일거리든 일거리가 생기면 마음이 따뜻했어. 일거리 한 가지가 없어지거나 끝나고 나서 다음 일거리가 생기면, 아, 이번 달에는 이제 생활비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구나 싶어서 배가 부른 것 같았어. 끊어지지 않고 일거리가 생겨서 사람은 다 살게 마련이구나 할 때의 느낌은 좋지는 않지만 몸에 잘 맞는 스웨터를 입고 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어. 난다가 말하는 “밥을 사 주는 친구”의 느낌이 내게는 아마 “일거리를 구해주는 친구”라고 번역될 수 있을 거야.
누군가에게 이사를 부탁하고 일거리를 부탁하는 것은 그이에게 내 존재를 의탁하는 것이고 내가 사는데 네 힘이 꼭 필요하다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지. 그렇게 이사를 마치고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이 그저 한 사람당 팥빙수 1/2인분일지라도, 그렇게 일거리를 얻어서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이 그저 사탕 한 통일지라도, 그이가 나를 일으켜 세워 내가 내 발로 서서 그이를 기억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지. 어쩌면 모든 거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