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2 번 글: 오독의 힘 (2)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05월 13일 19시 07분 |
읽은수: 871 |
학부 시절, 여자인 나에게 책읽기는 어떤 가능성을 주는가에 대해 잠시 생각한 적이 있다. 시간을
따라 되돌아가면 갈수록 남자들의 이야기인 역사와 소설의 길 위에서 나에게는 독자로서 어떤
가능성이 남겨져 있는가에 대해 잠시 멈춰서 갸우뚱한 적이 있다. 여성으로서의 내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나와 책 사이에는 발이 드리워지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나는 책읽기를 나와 무관한 他者를 구경하는 일로 만들 것인가 하고. 나는, 그리고 나를
앞서가고 뒤따라가는 여자들 하나하나는, 어떻게 책을 통해 다른 시대, 다른 삶의 현장과 자신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항상 이런 상념에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생활은 늘 번다했고, 항상 이런 상념보다 더 급하고 분명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생각은 그저 머리 한 귀퉁이에 간신히 붙어 있었다. 어떻게 글을 읽어야
저자와 글과 내가 행복하게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는 답이 없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 “Shakespeare in Love”를 보고 무릎을 쳤다. 이 영화의 Shakespeare는 실제의
Shakespeare와는 전혀 달랐다. Shakespeare는 영감에 집착하는 예술가형 인물이 아니었다고
한다. 글을 쓸 때마다 왕이나 정치 실세가 어떻게 생각할까를 세심하게 고려하고 노후를
위해 교외에 미리 집도 사 두고 저축도 해 두는 그런 사람이었다.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전언을 전면에 드러내는 「맥베드」는 청교도 혁명을 一掃하고 즉위한 제임스 1세의 즉위식에
맞추어 공연한 연극이다. Shakespeare가 그만큼 권력자의 마음을 읽는 데 힘을 쏟은 것이다.
시대가 시대였으니 만큼 Shakespeare의 대표적인 희곡에서 여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인물”로
그려진 예는 그리 많지 않다. 4대 비극을 살펴보자. 「리어왕」의 코딜리어는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이기보다는 “리어왕의 보기를 거부한 진실”의 의인화된 모습에 가깝고, 「오델로」의
데스데모나는 오델로의 열등감을 조명하는 조명등의 역할이 강하기 때문에 그저 “예쁘고, 착하고,
도무지 아무 생각이 없는 귀족의 딸”로 그려진다. 햄릿의 어머니는 도무지 왜 시동생과 재혼을
했는지 극 중에서 자기 심경을 털어놓지 않는다. 레이디 맥베드는 차라리 예외적인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영화에 등장하는Shakespeare의 연인 바이올라는 그런 점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인물이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Shakespeare의 작품을, Shakespeare의 시대를 멋대로
오독함으로써 Shakespeare의 연극을 빌려 헐리웃에 대한 풍자극을 만들어 낸다. 극장주와 연출가,
연출가와 극작가, 연출가와 유명배우의 관계는 아주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려져 있다. 스캔들을
그려낼 때에도 영화는 속도감이 넘친다. 문제의Shakespeare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성관계부터
가지게 되는 것도,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하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그렇게 스스럼 없이 그려내는
것은 현대의 미국에서 더더욱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바이올라는 아주 강력한 인물이다. 단순히 Shakespeare와 놀아나는 여자는 아니고, 규범을 깨고
연극을 하는 여자인 동시에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딸이기도 하며, 영화 속에 나오는Shakespeare의
환상처럼, 어디 외딴 곳에 혼자 던져두어도 살아남을 것 같은 여자이다. Shakespeare의 시대인
16세기에는 나타나기 어려운 인물인데 영화는Shakespeare를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오독함으로써 그런 여자를 끌어낸다. 어찌 보면 현대 관객이 그런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간파한
감독 혹은 시나리오 작가의 농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관객에게 잘 보여야 사람들이 영화를 많이
볼 것이고, 자기들은 돈을 많이 벌 거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당대의Shakespeare가 자기 연극을
잘 팔려도 노력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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