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4 번 글: [펌] 여성주의와 박근혜 |
| 글쓴이: 프리야 |
글쓴날: 2002년 04월 05일 20시 02분 |
읽은수: 936 |
밑에서 본 세상 자유게시판에서 퍼온 글입니다. 계속 퍼오기만 해서 쑥스럽지만 어쨌든 자유게시판이니 아무쪼록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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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한 여성이 여성주의를 위해서 박근혜를 지지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을 처음 접했을 때만해도 그냥 그러려니했다. 원래 좀 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짐작하고 있던 터라...
월간 <말>이 인터뷰를 하고, 이어서 <한겨레>도 이 주장을 둘러싼 논란을 소개하고 난 뒤에야, 이 발언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살류쥬라는 여성문화동인 사이트를 중심으로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꽤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박근혜가 대선에 나선다면 표를 찍을 수 있다는 여성들의 주장은 대체로 이렇게 요약된다.
1. 진보적인 남성보다는 보수적인 여성이 여성들에게 낫다.
2. 진보운동조차 언제나 운동을 위해 여성의 희생 또는 여성주의의 유보를 요구했다.
3. 여성 문제를 위해서는 여성이 정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
4. 여성들의 정치적 반란이라는 상징적 충격 요법을 통해 남성들에게 이 땅의 여성들이 얼마나 열받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여성주의당이 필요하다는 여성의 정치세력화 주장도 나온다.
이런 주장에 상당한 여성들은 공감을 표시하고, 마초적 남성들은 때로는 `진보'라는 잣대로, 때로는 `여성주의의 포용성'을 무기로, 때로는 `박근혜의 보수성'을 이유로, 이 여성들에게 테러와 조롱을 퍼붓고 있다.
이런 마초적 조롱과 테러는 그냥 분쇄의 대상일 뿐이며, 논란거리가 못된다.
1. 번지수를 잘못 잡은 비판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이다.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박근혜가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며, 박근혜는 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정치적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여성주의자 김정란선생도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는 번지수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비판에 대한 반박은 너무나 쉽게 예상할 수 있으며, 그 반박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반박이란 왜 박근혜와 박정희를 동일시하느냐, 박근혜를 독자적인 한 여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을 남성의 종속물로 보는 것을 거부해온 여성주의자들로서는 마땅히 재반박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장이다. 여기에 박근혜가 아무리 보수적일지언정, 진보적이라는 남성들보다는 여성문제에 있어서 더 나을 수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게 되면, 사실 마땅한 대응법을 찾기 곤란해진다.
2. 박근혜 지지론에 대한 유효한 비판
박근혜 논란은 순수히 여성주의 관점에서 비판할 때만, 그 위험성을 제대로 지적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서 김정란선생이 월간 <말> 4월호 반박글 마지막에 단서를 약간 내비쳤다. (김 선생은 사실 이 글에서 이 마지막 부분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글을 썼어야 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만약 박근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경상도 사람이니까 경상도 사람 찍고, 전라도 사람이니까 전라도 사람 찍는 지역주의적 정치행동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여성주의가 한 사람의 정치인이 한 사회 안에서 어떤 가치를 대변하는가에 대한 고뇌 없이 이렇듯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여성주의는 힘들게 빠져나온 생물학적 환원론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 비판만이 이른바 `박근혜 지지 여성주의자'들의 거짓 여성주의를 제대로 폭로할 수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문제는 섹스와 젠더의 구별이다. 섹스는 생물학적 남, 녀 구별이며, 젠더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여, 남이라는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주의의 투쟁사는 곧 섹스에서 젠더로 논의를 바꾸는 것이었으며, 여성주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열받고 화가 나더라도, 결코 빠지면 안되는 유혹이 바로 이 섹스로 돌아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여성주의는 바닷가에 지은 모래성일 뿐이다.
3. 박근혜 지지론의 여성주의적 위험성
그래서 문제는 박근혜가 또는 박근혜 지지가 이 사회에서 섹스의 문제인가 아니면 젠더의 문제인가이다.
물론 박근혜는 젠더로서 여성일 수 없다. 그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전적으로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고, 그래서 한나라당의 부총재까지 됐다. 그의 지지자나 한나라당이나,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의 딸,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박정희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를 밀어준 것이다.
여성주의를 위해서, 보수적인 여성이 진보적인 남성보다 훨씬 낫다는 말은 백번 옳다.
또 여성의 권리 신장과 여남평등을 위해서는 여성이 나서야 한다는 말씀은 천번 옳다.
그런데 여기서 지칭한 여성과 남성은 여성 성기와 남성 성기를 갖춘 생물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갖춰진 정체성으로서 여성과 남성이다. 이 점에 관한 한 박근혜 지지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어떤 `아줌마'나 그 주장에 동조하는 다른 여성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젠더로서 여성을 위해, 섹스로서 여성인 박근혜를 지지하겠다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가능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을 위해서 노동자계급 출신의 자본가를 지지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공격이며, 여성주의 파멸의 길이다. 생물학적 성에서 벗어나 사회적 성으로 논의를 변화시키자는 100년 이상의 여성주의 투쟁에 대한 배신일 뿐이다. 어찌 그 투쟁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 투쟁을 위해 그 투쟁이 벗어나려고 했던 바로 그 것을 이용하겠다고 하는가?
이런 섹스로서 박근혜의 지지는 여성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여성들에게, 여성운동이 생물학적 성 대결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또 여남의 문제를 생물학적 성의 차원으로 돌려서 이데올로기 공세를 펴는 마초들에게 이 많은 여성들을 무방비상태로 내던지는 범죄행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마초들이 자기 어머니에게, 여동생에게, 자기 배우자에게 뭐라고 할지를.. "여성주의는 기껏 치마를 둘렀다는 이유로 대통령선거에서 지지할 수 있다는 단순, 무식, 천박한 것이다. 행여나 그런 바보스러운 운동에 물들지 말라."
얼마나 귀에 솔깃한 말인가. 노무현을 지지하는 여성들에게나, 이회창을 지지하는 여성들에게나.. 민주당 지지 여성에게나, 한나라당 지지 여성에게나, 또 민주노동당 지지 여성에게나.
4. 여성주의가 곧 진보인가?
박근혜를 지지하는 여성들 가운데 일부가 벌이는 사기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박근혜가 여성이기 때문에 어떤 남성보다 더 여성주의적일 수 있고, 여성주의는 곧 진보이기 때문에, 박근혜 지지는 진보이다, 이런 논법을 펴고 있다. 물론 이는 논리 장난일 뿐이다.
여성주의는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다. 그들은 이 말이 마치 여성주의가 곧 진보인 듯 장난을 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여성주의가 곧 진보가 아니라, 진보적이지 않은 여성주의는 여성주의가 아닌 것이다.
여성주의는 진보를 생명으로 하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여성주의는 진보를 버리는 순간 그 목숨이 끝난다. 여성주의의 필요조건이 진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이라는 말은, 그 말이 섹스가 아니라 젠더일 때, 착취과 고통의 동의어이며, 밑바닥 계급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어찌 착취의 계급구조 가장 아래 있는 이들이 보수적일 수 있는가?
그러니 여성주의는 가장 진보적이어야 한다.
대통령선거라는 실천의 장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여성후보를 내세우거나 가장 진보적인 여성 또는 남성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 물론 비록 가장 진보적인 남성 후보라고 할지라도 여성주의적이지 않을 수 있으면, 그렇다면 그 후보와 투쟁을 통해 그를 여성의 후보로 만들어야할 의무가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박근혜 지지자들은 가장 진보적이라는 후보를 지지해온 결과가 이것이냐?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이 결과는 그 여성주의자들이 자초한 것이지 `진보적인 남성 후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과연 그 여성주의자들은 진보적인 후보를 단지 진보적인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찍지 않았는가?
그 진보적인 후보를 진보적인 여성후보로 만들기 위해 투쟁했는가?
남성이라는 존재가 자발적으로 여성에게 양보할 것이라는 환상을 당신, 여성주의자들은 아직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여성주의자 당신들의 나이브함을 탓할 일이다.
자본가들이 결코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양보하지 않듯이, 그 어떤 남성도 여성에게 자발적으로 양보하지 않는다. 동정심을 발휘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물론 여성주의의 투쟁은, 남성들이 벌이는 투쟁처럼 파괴적이고 억압적이며 이분법적일 수 없다. 당연히 달라야 한다.
전투적이되, 수천년의 역사속에서 보여준 자기파괴적인 남성적 전투성이 아닌 여성주의적 전투성....
그것이 섹스로서는 남성이되, 젠더로서는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애쓰는' 한 남성의 희망이다. 비록 실현 가능성이 적더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2002.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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