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7 번 글: 아라비안 나이트 혹은 이야기를 은폐하는 텍스트 - 1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03월 08일 09시 01분 |
읽은수: 1025 |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쿤다미르라는 이름의, 그 위세가 당당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용맹무쌍한 무사로서 카라만과도 비교될 수 있을 정도였으나 닥쳐오는 세월의 파도를 막을
길이 없이 아주 노쇠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노쇠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알라의 뜻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므로, 왕은 이 뛰어나게 아리따운 갓난아이의 이목구비를 기리어 아지브--희한한 자--라고
명명했습니다. 갓난아이의 시중은 산파와 유모, 시녀가 맡았는데, 그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란
아지브가 만 일곱 살의 봄을 맞이하자 이번엔 친척 되는 자로서, 같은 신앙에 귀의하는 고승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이 고승은 왕자에게 이교의 법률과 교의를 전수하고, 철학과 그 밖의 만반의
지식을 가르쳤기 때문에 채 삼 년도 되기 전에 왕자는 그 학문들을 통달하여 마음은 너그럽고,
사리분별도 훌륭하여 완전히 어른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박식하고, 天理에 밝은 학자가
되어, 현자와 사귀기도 하고, 법률박사와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부왕은 이 모습을 보고 아주
기뻐하여, 다음에는 마술과 창술, 검술 따위까지도 모두 읽게 했으므로 왕자는 마침내 뛰어난
기사가 되었고, 온갖 무예의 묘기를 죄다 습득했습니다. 그리고 약관이 지날 무렵에는 만사에 걸쳐
당대에 견줄 자가 없는 무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자는 무술의 솜씨를 뽐낸 나머지 어떻게 할 수 없는 폭군, 오만불손한 악귀가 되어, 많은
기사들 사이에 끼여 사냥을 일삼기도 하고, 이웃나라의 기사를 습격하여 약탈하기도 하고, 대상을
털기도 하고, 혹은 또 왕후귀인의 딸을 유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부왕에게 왕자의
비행을 호소해왔기 때문에 왕은 다섯 명의 노예에게 "그 놈을 잡아오너라!"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아지브 왕자를 체포하여 두 손을 등뒤에다 결박지어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방에다 감금한 것입니다. 아지브는 이틀 낮과 하룻밤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만 이윽고
태수들이 부왕에게 사후하여 어전에 엎드려 왕자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구슬렸기 때문에 부왕은
마침내 왕자를 석방했습니다. 아지브는 열흘 동안 부왕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참고 있었습니다만
열흘째 되는 날 밤에 부왕이 자고 있는 방으로 몰래 침입하여 그 목을 잘랐습니다.
--「가리브와 그의 형 아지브의 신상 이야기」,
범우사판 아라비안 나이트 7권 중에서
20년의 세월을 이처럼 단숨에 정리하다니, 나는 글을 읽으면서 계속 그 대담성에 놀랐다. 이 글은
어느 옛날 지금의 서아시아 지역 어딘가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어느 왕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그가 왕자라는 것, 영민하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는 것, 이
세 가지밖에는 없다. 우리는 그가 왜 어머니가 아닌 산파와 유모, 시녀의 손에서 자랐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살아있었던 것일까?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납치해 온
불행한 처녀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 곳의 관습이 왕자는 산파와 유모, 시녀의 손으로만 키우는
것이었을까? 왕자는 그에 대해 불만이 있었을까, 아니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 일곱 살 짜리
아이가 삼 년만에 학문에 통달할 수 있다면 그 나라의 학문이라는 것이 한심한 수준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법률이래 봐야 10개 정도의 계율이 있고, 신학이래봐야 황금송아지를 잘 섬겨라, 혹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학자나 현자, 혹은 법률박사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이 실은 얼간이가
아니었을까? 흔히 사냥장면이 등장하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왕자의 사냥은 왜 비난거리가 되는
것일까? 왕은 혹시 이 왕자를 들들 볶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수많은 납치혼의
사례가 발견되는데 왕자에게는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 나라의 관습은 다른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다른 나라보다 여자를 존중하는 것이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왕과 동맹관계에
있는 나라의 공주를 훔쳐와서 국방에 문제가 생긴 것에 왕이 노한 것이었을까? 왕은 왕자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왕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꼈을까? 이야기의 화자는 왜 왕자가 "마음은
너그럽고, 사리분별도 훌륭"하다고 쓴 그 입술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왕자가 "폭군, 오만불손한
악귀"가 되었다고 뻔뻔하게 태도를 돌변한 것일까? 화자는 혹시 자신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도,
오만불손한 악귀라고 말하는 것도 모두 동전의 앞뒤처럼 아무 차이도 없고, 자신의 말이 실은 우리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한 이야기일 뿐 의미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화자는
짐짓 오랜 옛날의 어느 이국을 예로 들어 멀쩡하던 아들이, 총명한 왕자가 어느 날은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는, 이 낯설고 불편한 풍경,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죽은 왕이나
아버지를 죽인 왕자에게는 삶을 뒤흔든 감정의 파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남아 그걸
이야기로만 듣고 있는 우리에게 그 감정의 파도는 그저 흥미거리 아니냐고, 아무려면 어떠냐고
화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서술방법을 조금만 바꾸면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이해해
버리고 잊어버릴 우리를 화자가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버지를 죽인 아지브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형을 죽이는
아지브의 배다른 동생 가리브이다. 아지브는 몇백 페이지가 이어지는 이 이야기에서 초반부 몇
페이지에서 끔찍한 일을 저질러 우리를 놀라게 할 뿐, 그 이후에는 계속해서 가리브와 전투를
하거나 패주하고 달아나거나 이슬람을 모욕해서 천벌을 받는 역할 이외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아지브는 그저 이야기의 첫 두 페이지에 나타났다가 성격 없이 이름만 남아 煙氣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이슬람교도의 적인 이교도로서, 기이한 폭군으로서만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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