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3 번 글: 여인열전 2 --짝패 (4)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02월 20일 09시 24분 |
읽은수: 925 |
겨울 밤, 야근을 하고, 친구들이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 빈방으로 돌아올 때면 ㅈ이 생각나기도
하지. 회사 고참들은 내가 술을 잘 먹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술을
계속 주고, 나는 그런 분위기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인 척, 능청맞게 웃고 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늘 ㅈ이 없는 이 자리에 나 혼자 남아 있는 것이 버거워. 윗사람들은 당연한 권한이기라도 한 양,
아랫사람들 앞에서 자기들만 "씨발"을 간투사로 사용하지. 회사를 다니면 "오입"이나 "대가리 박아"
같은 웃기지도 않은 말들이 농담을 대체하는 이상한 술자리에 자꾸 가야 해.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적응"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거기서 조금씩 자꾸 다치는 것 같아. 남자들은 대범한 척 하지만
끊임없이 누군가가 자기를 무시할까 두렵고 제 때 승진하지 못하고 밀려날까 두려워 연공서열에
기대고, 내가 웃기만 해도 자기 약점이 잡힐까봐 깜짝깜짝 놀라. 회사에서 난 대개 잘 지내지만 어떤
날은 서로 소리 질러줄 짝패가 없는 것이 쓸쓸하지. 지금, ㅈ도 어딘가에서 직장엘 다니고 있다면 내
마음이 달랐을까. 밤하늘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어떨까.
"***, 우리, 다시 한 번!"
그러나 전에 우리 함께 앉아 농담처럼 말했듯, ㅈ이나 나나 둘 중 하나가 몇 년쯤 어디 마당 있는
커다란 집에서 김치를 열 가지씩 담그고 젓갈을 다섯 가지씩 담가 장독을 채우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한 사람이 "좁은 안"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이 "넓은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예전에 ㅈ이 "넓은 학생회관"에 있고 내가 "좁은 도서관 열람실"에 있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듯이 말이야. 난 열람실에서도 마음 한 켠이 늘 "마님"이었어. 내가 아는 ㅈ 역시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마님일 것이고, 모든 마님은 예수가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미역국
한 솥으로도, 김밥 한 줄로도 세상을 먹일 수가 있지. 미역국 한 솥으로도, 김밥 한 줄로도 세상을
교란시킬 수가 있지. 지금 ㅈ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마무리가 되면 우리 마주앉아 "마님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마님"이 되는 거. 세상을 틀에 넣어 한꺼번에 한 틀로 다
이해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욕심과 조바심을 넘는 거. 자기 자리에 서서
천천히 자기 눈으로 보고 때때로 깔깔 웃는 거. 때때로 소리 지르는 거. 때때로 자기 방에 누군가를
재워주면서도, 히죽히죽, 그 사람을 구박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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