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2 번 글: 여인열전 2 --짝패 (3)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02월 23일 03시 32분 |
읽은수: 861 |
학교 시절, 때로 정말 많이 아픈 날이면 ㅈ의 방에서 ㅈ이 해 주는 혼자 된 고모며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곤 했지. 할머니가 된 고모들이 ㅈ네 모여 앉아 서로 남의 약을 탐 내서 서로 병명도
다르면서 덮어놓고 하나씩 나누어 먹는 세계, 자기들은 놀면서 며칠 전부터 제사 준비를 하고
이제야 한숨 돌리고 설거지하는 ㅈ 어머니에게 물을 갖다 달라고 하는 세계. 어느 고모는 젊어
청상이 되었고, 어느 고모는 일본에서 돈을 벌었고, 또 어느 고모의 자식은 이렇고, 어느 고모는
다른 고모를 부하 다루듯 하고, 어느 고모는 이런 잔소리를 하고……. ㅈ이 그려내는 세계는 밥을
먹고 잠자는 일상에서 드러나는 가부장제를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세계인 동시에
고모며 할머니의 생생한 숨결 역시 살려내는 세계였지. 20대에는 조금만 앞길이 가로막혀도
눈앞이 캄캄하지. 그 시절, 난 심심찮게 ㅈ에게 괴로움을 호소했어. 하지만 내가 아무리 심각하고
진지하게 내 삶의 괴로움을 호소해도 ㅈ은 거기에 무겁게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 한참을 듣다가는
내 말을 자기 옷섶에서 툭툭 털어 내고는 자기 친척들 이야기를 해 주었어. 병든 노인들이 남자들
앞에서는 그나마 얌전하다가 며느리든 손녀든 여자 앞에서는 얼마나 괴팍한지, 제사상 차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만 끝없이 이야기 해 주었어. 남자 대학 남자 학과에 다니는 것이 지겨웠던 나는 ㅈ
이야기를 들으면 결국은 잠이 왔어. ㅈ처럼 내 말을 무심하게 들어 넘기는 사람이 없는데도, ㅈ처럼
아무 조언도 안 하는 사람도 없는데도 ㅈ 이야기를 들으면 늘 잠이 왔어. ㅈ이 그려내는 세계는
끊임없이 문제가 있고 더 나이 많은 여자들이 자기 핏줄이 아닌 젊은 여자에게 계속 어려운 일을
시켜먹는 세계였지만 무섭기만 한 세계는 아니었던 것 같애. 늘 조금쯤은 웃어른을 놀려먹을 여유가
있고, 조금쯤은 시집식구의 흉을 볼 여유가 있었어. 모두가 다 문제 투성이이지만 누구도 혼자 다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 세계. 듣고 있으면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만 같았어.
ㅈ은 누군가가 힘들게 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는 억지 섞인 행동을 다 미화하지 않았고
누군가가 고루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고집이 다 틀렸다고 하지 않았어.
사회과학 세미나에서, 젊고 순하기만 한 선배들은 우리에게 한없이 단순해진 맑스를 보여주었지.
남자 선배들은 세상을 사각틀에 넣어서 우리한테 주고는 그게 버거우니까 자꾸 술을 먹자고 하는
것 같았어. 그런 세미나를 하고 나면 나는 어쩐지 무섭고 무거워서 소화가 잘 되지를 않았어. 그럴
때면 자기 방에 쳐들어가 잠자리에 든 내 머리맡에서 ㅈ이 내 소화관을 뚫어주었어. "맑스"가
함부로 네모나게 썰어버리려고 한 세상을 힘센 ㅈ이 다시 삐뚤빼뚤하게 오려냈어. 나는 ㅈ이
오려낸 조각들을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세상, 우리가 실제로 만난 사람들 사이에 마구 흩뿌려
"맑스"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는 짖궂게 히죽히죽 웃었어.
ㅈ은 나보다 음식도 더 잘 했지. 국, 찌개 이런 거. 언젠가 미역국을 한 솥 끓여 놓고 우리 자취생들을
불렀을 때, 그릇이 모자라 국그릇이든 접시든 구분하지 못하고 한 사람 앞에 그릇을 하나씩 주고
거기에 밥이랑 국을 같이 덜어주었지. 집 밥이 늘 그리웠던 우리는 모두 신이 났어. ㅈ은 국 한
그릇으로 너무나 당당해져서는 집밖에서 처음 한 미역국인데도 이렇게 맛있다고 큰소리를 쳤지.
국 한 그릇으로 밥 지은 사람이 좌중의 주인이 되는 그런 점심 시간이 나는 참 좋았어. ㅈ은 신이
나면 술자리에 김밥을 한 통이나 말아 오고, 팀 스터디를 가면 숙맥 같은 나를 끌고 속초 시장에 나가
고추장 게장을 사 왔어. 한편으로는 지기 싫어서 ㅈ 옆에 서서 할 줄도 모르는 오믈렛을 한다고
하다가 시금치를 너무 많이 썰어 넣고, 여행지에 가서는 장소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호박전을 한다고
시간을 끌면서 머리를 벅벅 긁었지만 나는 부엌에서는 걔 그늘에 있는 듯한 그 느낌이 참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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