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1 번 글: 여인열전 2 --짝패 (2)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02월 20일 09시 17분 |
읽은수: 830 |
내가 시험을 본다고 집을 나와 신림동에서 남의 가정집 곁방살이를 하고 있을 때, 내 방에 놀러온 그
애는 멀쩡한 고시생인 나에게 "나중에" 박사를 하라 했지.
"뭔 박사? 난 전공은 싫은데? 과를 정해주면 박사가 되어 주마."
"에이, 진짜! 그런 것까지 정해 주어야 해? 그런 건 네가 좀 알아서 해."
ㅈ은 밑도 끝도 없이 내게 헛짜증을 냈지. 나는 그게 우스워서 막 웃었지. 네가 내 마음을 아는데
내가 어디선들 길을 잃으랴 하고. 무엇을 한들 길을 잃으랴 하고.
ㅈ은 사소한 일로도 통상적인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곤 했어. 선배들의 여자친구/아내들과 ㅈ, 그리고
ㅈ 남자친구까지 네 커플이 술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다지. 우리 동아리는 원래 '마님' 전통이
있었더랬지. 그래 그날도 그 네 마님이 남자들을 저 켠에 치워놓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지. 사실
여자들끼리는 오래 알던 사이도 아니었지만 신나게 자기 남자친구/남편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지.
원래 마님들이란 그렇지. 서로를 두려워하지를 않지. 갑자기 벌어지는 술판을 두려워하지를 않지.
자부심이 강해서 남의 마님이 자기랑 달라도 쉬 흔들리지를 않지. 그래서 몇 번만 만나도 금새 함께
깔깔거리지. 음, 그런데, 그 날의 술자리에는 ㅈ의 예전 남자친구와 그의 현재 여자친구--
마님 2--도 끼어 있었다고 해. ㅈ은 그날 마님 2와 앉아 각자의 현재 남자친구 흉을 주고받고는
신나게 놀았다지. 자기의 옛 남자친구가 지금 사귀는 여자를 만나 남자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
웃는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입으로는 "엽기야" 중얼거렸지만 내심으로는 그 또한 화해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어. 따지자면 ㅈ이 마님 2를 싫어할 이유는 없기는 하지. 하지만 "마님"이 아닌 사람은
좀처럼 그렇게 하지 못하거든. ㅈ은 앓을 때는 질리게도 앓는 성격이었어. 그러나 안 앓는 척 하면서
통증을 끌고 다니지는 않았던 가 봐. 그렇게 지나간 일을 지나간 일로 놓아줄 수 있으니 ㅈ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지나간 남자 친구도 씩씩하고 힘찬 그의 새 여자친구도 현재 선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인정해줄 수 있으니, 그토록 마음이 가벼우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가벼운 사람을 보면 내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좋아. 그런 것이 바로 삶과의 화해가 아닐까.
내 손을 떠난 것과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그것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게 그런 게 아닐까?
나중에 그런 마님들이 모이면 나도 부르라고 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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