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0 번 글: 여인열전 2 --짝패 (1)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2년 02월 23일 03시 29분 |
읽은수: 920 |
학교 시절 한 시절 ㅈ과 나는 짝패였지. 우리는 문학 동아리의 공동 문예부장이었지. 사람이
모자라 사회부장 할 사람이 없었는데도 우리는 멋대로 하고 싶은 것만 했지.
ㅈ이랑 나는 성격이 딴판이었는데도 문학 세미나 때문에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지. 대개는 ㅈ이
기복이 심하고 내가 덮어놓고 심각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우리는 항상 싸우면서도 일을
할 때는 손발이 잘 맞았어. 애들이 몇 참가하지 않으면 김이 새서 세미나를 곧잘 관두자고 하던
ㅈ은 내가 전에 없이 술을 퍼마시고 6시에 술에 취한 채 나타난 날에는 내가 건들건들 후배들
앞에서 졸고 있어도 잔소리 한 마디 없이 척척 세미나를 진행시켰어. 항상 서로 욕하고 있었는데도
상대가 정말 마음이 상한 날은 미리 알고는 모르는 척 해 주었어. TS 커리를 짤 때나 학기별로
커리를 짤 때에도 만나서 한두시간이면 별 실랑이 없이 안이 나왔어.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생각을 온통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맞춤하게 균형이 맞았다고 할까. 항상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적당히 무시하는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일을 할 때 늘 상대방의 자리를 남겨두었던 게지.
여행을 갈 때에도 당일 날 아침에 행선지를 결정해 버리는 ㅈ과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는 사소한
저녁모임도 하지 않으려고 하던 학교시절의 나는 상대방을 좀처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서로 상대의 성격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애. 둘 다 자기 고집이 세고 번잡하고 정신없기로
유명한 여자들이었는데도 우린 일 때문에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어. 좀처럼 서로 어려운 말도 잘
쓰지 않았어. 나중에 후배들 중에 동아리 일 가지고도 엄청 어려운 말로 논쟁하는 애들을 보고야,
'우리도 저럴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었어.
우리가 싸울 때는 딴 것 때문이었어. ㅈ이 나랑 싸울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난 서울이
집이고 같은 여자인 ㅈ이 제멋대로 술을 마시고 후배 방에서 뻗거나 밤새도록 동연 선거에서 무언가
해도 가족이 ㅈ을 내버려둔다는 것, 혹은 ㅈ 자신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늘 샘이 났어.
샘이 나면 나는 밑도 끝도 없이 "나쁜 X"라느니 말도 안 되는, 누가 들어도 웃기기만 한 욕을 하고는
학생회관 XXX호의 문을 열고는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다니거나 ㅈ을 쫓아다녔어. 그리고는
학생회관 3층이 울리도록 한참 웃었어. 그 질투심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거든.
어쩌면 기복이 심할 때면 학기를 휴학도 안 하고 그냥 보내버린 ㅈ으로서는 정신도 못 차리고
있으면서 악착같이 성적을 잘 받아내는 것 말고는 학교 생활을 버티는 방법을 모르는 나도 역시
한 번씩 소리를 질러 주어야 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서로 "이상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거기서 그쳤어. 서로 조목조목 비난하지는 않았어. 상대방이 겁쟁이 모범생인
줄을 알아도 뒷마무리를 잘 못하는 줄을 알아도 모르는 척 했어. 나는 내가 집안 눈치보느라
거의 한 번도 참석하지 않는 술자리에 ㅈ이 있는 것이 좋기도 했어. 내가 있을 수 없는 곳에 ㅈ이
있어 후배들과 함께 있는 것이 그저 질투만을 불러온 것은 아니야. ㅈ이 어설픈 말을 하거나 잘
삐지거나 한다고 후배들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마치 중개방송을 하듯 나한테 일러바치는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있는 것보다는 ㅈ에게도 안심이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 둘 다 선배나 후배에게 서로 더 사랑 받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으므로, 늘 자기가
글을 더 잘 쓴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므로, 늘 자기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싶었으므로,
경쟁상태이기도 했지만, 복도를 한 번 뛰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항상 상대방에게 너그러워져서는,
그러나, 내가 하지못하는 것을 네가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에 웃기만 했어. 우리는
그랬어. 해가 갈수록 더 그랬지.
3학년 1학기, 동기들이 다 떠난 자리에서 ㅈ이 남아 동아리 회장을 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함께 있는 남자들이 친절하든 거칠든, 항상 남자애들보다 조금씩 더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든 남자
대학 여학생으로서, 다른 사람이 아닌 ㅈ이 그 자리를 버티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자랑거리였어.
ㅈ이 잘 하고 있다고 하면 자랑스러웠고, ㅈ이 조금쯤 미숙하다고 해도 내 마음은 ㅈ 편이었어. 내
발로 시험준비를 한다고 동아리를 떠났으면서 내가 그곳에 있지 못하는 것이 쫓겨난 것처럼 때때로
마음이 아프기는 했지. ㅈ을 질투하기도 했지. 그래도 나는 그래도 과에 앉아 있다가 수업 시간에 말
안 듣는다는 후배를 만나면 "멀쩡한 동아리 주간회의에는 왜 빠졌냐"고, "ㅈ을 힘들게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한 바가지씩 할 수 있어서 좋았어. ㅈ이 남아 있으니 나는 걔를 핑계로 잔소리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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