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거세된 정인의 인생을 사느니 난 차라리 빨간 구두를 신고 하루종일 춤을 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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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갑자기 엉뚱한 말이 떠오르는 날이 있다.
"내 안에서 누군가가 자꾸 노래를 하고 있어요.
내 안에서 누군가가 자꾸 춤을 추고 있어요.
내 안에서 누군가가 자꾸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릴 때 시집살이에 대한 소설을 읽으면 늘 충격을 받곤 했다. 아버지가 셋째이고 아버지쪽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방에 사시는 까닭에 시집살이라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역설적으로 책에서 묘사하는 모든 시집살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곤 했다. 며느리가 되면 일을 많이 하고 시집 식구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 보다는 자기 욕망은 내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무서운 이야기였다. 설혹 시간이 남아도 저녁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서는 안 되며 휴일날 집을 비워서도 안 되는 삶. 아이가 하루쯤 혼자 있어도 되는 나이가 되어도, 남편이며 시부모가 먹을 것을 해 둔다고 해도, 혼자 여행을 가서는 안 되는 삶. 당장 필요한 것이 있든 없든 항상 집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삶.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웠다. 가족이 달라 하면 뭐든지 내놓아야 하는 삶만이 착한 여자의 삶이고, 착해져야 가족이 여자를 버리지 않고 사랑한다는 그 이야기들은 어떤 "전설의 고향"보다 열 배는 더 무서웠다. 가족 입장에서는 안 해 받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인데도 어머니는, 아내는, 며느리는, 자기가 간절히 하고 싶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걸 해 바쳐야 한다는 건, 아무리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도 납득하기 힘들엇다. 미화하기 위해서 쓰여진 이야기이든 고발하기 위해서 쓰여진 이야기이든 어린 시절 내가 본 소설 속의 어머니며 아내, 며느리들은 너무 무서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가족을 도왔지만 가족에게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살았고, 가족 밖의 사람과 친구가 되어 진심으로 서로 도울 시간도 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투덜씨의 글을 보고 힘이 났다. 착한 것은 최소한의 토익점수를 받기 위해, 무서워 떨면서 옆사람에게 지우개를 다 내어주고 답안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청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자기 지우개를 얼마쯤 끊어 주고도 자기 토익점수는 자기 힘으로 책임질 수 있는 그런 거라는 말을 보고 힘이 났다. 약한 것과 착한 것은 별개이며, 자기 것을 다 빼앗겨 본 사람만이 득도하여 삶에 대한 혜안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 내가 늘 하고 싶었던 말을 나는 투덜씨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서 기뻤다.
내 주위의 어른들은, 그리고 내 안의 가부장은, 아직도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은 내가 고집이 세서 그저 타인들을 쥐고 흔들고 싶어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여자가 항상 남을 윽박질러서 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게 하는 여자와 어떻게 같은 말이 되는 거지? 분홍신을 신고 때때로 친구들에게 지우개를 잘라주지 말란 법이 어디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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