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9 번 글: 여인열전 1 --이지은 (7)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1년 12월 24일 17시 36분 |
읽은수: 994 |
회사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가 자기들보다 당연히 자기들보다 더 작은 소리로 웃을 거라고, 농담을
들을 줄만 알고 할 줄은 모를 거라고, 자기들이 단란주점 다니는 이야기를 조금씩 해도 나는 당연히
참고 있을 거라고, 자기들이 스크린 세이버에 야한 사진을 올려놓곤 한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내가
화들짝 놀랄 거라고, 자기들보다 소극적일 거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기대를 저버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나는 같은 술자리에서 같은 사람이 나더러 회사에 오래 있다가 승진도 하라고도 하고
그러다가는 또 의례 여자란 남편이 전업주부가 되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하는 이
사람들이 너무 한심해서 그냥 웃기만 한다.
‘이 사람아, 여자든 남자든, 삶이란 그렇게 극과 극을 달리는 것이 아니야. 남자든 여자든 그렇게
전형에 딱 맞는 사람은 없어. 당신은 그 나이가 되도록 그것도 모르나.’
“***씨, 남자 있어요?
”아니요. (저의) 주가가 하락해서……. 결혼하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슴다.“
식당에 가면 말단인 나는 먼저 수저를 놓아주어야 하는데 딴 생각을 하다가 매번 잊어버리고 눈치를
받는다. 나는 하루 내내 끝까지 웃기만 하고 회사 동료들의 틀린 기대는 노폐물처럼 마음에 와서
쌓인다. 웃어주는 것에 대해 내가 자기들을 비웃는게 아닌가 의심하는 걸 보면 자기들이 뭐라 하면
내가 바보처럼 당황해 주었으면 하는 것도 같다. 당황하지 않는 것도 문제인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면 웃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나는 한없이 작고 무기력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언니는
지방대 졸업생인 (주) XX 경리부 직원 이지은과 회계사 이지은을 턱없이 다르게 대하는 이 삶이
지겨울 것이다. 공무원 욕을 하다가도 무슨 일을 할 때면 필요 이상으로 공무원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지겨울 것이다. 부모 돈으로 잘 살고 있으면서도 그게 뭐 대단한 것인 양하는 사람들이
지겨울 것이다. 여전히 여자가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세상의 흔한 결혼이
지겨울 것이다.
자기 입으로
“나는 어떤 것도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지를 않지. 친구가 그러는데 내 말은 들을 때는 논리적인 듯
하지만 돌아서면 다 말이 안 된대.”
하는 이지은.
‘언니, 꼭 깊이 생각하는 데에만 길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상상할 수 있는 삶의 심각한 난관--지은언니는 내가 파산하거나 강간당한다고 해도 나를 위해서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내가 청하면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나를 위해서 일자리를 구해주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망설이지 않고 나를 위해서 법정에 서거나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과
싸워줄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이면 이메일로 유유히,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길 것이다. 내가 부모의 병수발을 혼자 전담하게 되거나 미혼모가
되어도 나를 동정하지 않고 마치 내가 늘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나를 대할 것이다. 잊지 않고 때때로
연락해서 밥을 사고 태연히 나와 일상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가벼움이 이런 것이라면 그 또한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경쾌함이 이런 것이라면 경쾌해 볼만 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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