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1 번 글: Human Comedy |
| 글쓴이: 띨띨이 |
글쓴날: 2000년 06월 28일 21시 49분 |
읽은수: 668 |
[안정효 칼럼] '먼스터 가족'의 시간 지키기
어느 날 오후 마루의 긴 의자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데 작은딸 소근 이가 학교에 갔다 들어오다가 서울방송에서 방영중인 코미디를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저게 '먼스터 가족'이야?"
나의 쌍둥이 딸 미란이와 소근이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 텔 레비전은 나쁜 것 이니까 보지 말라고 한 선생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지켜서 대학을 졸업한 지금까지 거의 텔레비전 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마이클 잭슨이나 김건모가 누군지 도 모르고, 옛날 심형래가 펭귄으로 나오는 '동물의 왕국' 이 하도 재 미있어서 내가 같이 봄 보자고 했을 때도 미란 이가 '펭귄은 키가 60 센티미 터쯤 된다더라." 하는 소리나 하고는 딴전을 부릴 정도여서 물론 '먼스터 가족'이 무엇인 지도 몰랐다. 그런데 난데없이 소근이가 가방도 내려놓지 않 고 선 채로 텔레비전을 몇 분 동안 열심히 지켜보더니 한 마디 더 했다.
"저래서 이모가 우리집 식구들을 가지고 먼스터 가족이라 고 그러는 구나."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가서 사는 처제가 우리집을 먼스터 가 족이라고 부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집에는 이상 (정상이 아닌)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상한가 살펴보기로 하자.
신문 기자 시절에 내가 쌍둥이를 낳았다니까 한국일보 동료 들이 놀라기는 커녕 '그럴 줄 알았다'고 당연해 할 만큼 이 상했던 나였고, 집안의 IQ는 소근이가 156에 미란이가 152 여서 네 식구 합치면 600에 가깝고, 아비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가인데 두 아이는 '거짓말'에 관심이 없다며 영화와 소설하고는 담을 쌓고, '너희 아버지는 소설가이니 까 집에서 세대차 같은 거 없겠다'는 친구에게 '우리집에선 부모보다 우리가 더 보수적이야'라고 선언했다는 신세대도 그렇고,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인데 서울대 인문대학을 수석 으로 졸업하자마자 수녀원으로 들어간 작은딸도 그렇고, 식 구가 겨우 넷인데 하나는 서울에서 소설쓰고, 하나는 대전 에서 교수하고, 횡성에서 수녀 하고, 하나는 독일 키일에서 공부하느라고 산산조각 이산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렇 고, 이상한 얘기 열거하려면 한이 없지만, 그 가운데 하나 만 골라서 따져보기로 하자.
우리집 식구들은 시간 관념이 남다르다. 아마도 그것은 바 로 나한테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시간 약속을 하 면 보통 20분 전에 나가고, 약속 시간이 되면, 예를 들어 1 시 30분에 만나기로 한 사람이 그때까지 안 나오면 가버린 다. 30분에 만난다는 약속은 기다리는 시간이 30분까지라는 뜻 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닐 때 내가 무척 좋아했던 여학생에게 노트를 빌 려준 대가로 겨우 영화 구경을 같이 가기로 했던 적이 있 다. 단성사에서 '황야의 3상사'를 보기로 했었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여학생이 나타나지 않아 나는 집으로 가버렸고 졸업 때까지 우리들은 그래서 학교 밖에서는 데이트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 그 여학생은 지 금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딸을 둘 낳았고 나는 다른 여 자와 결혼하여 딸 쌍둥이를 낳았다.
학원사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번역 일을 맡았을 때 의 사건이다.
워낙 방대한 소설이어서 번역료도 무척 많았는데, 그 돈을 어느 날 오후 2 시 종로의 고려당 빵집에서 만나 편집부 사 람에게서 받기로 했다. 나는 물론 약속시간보다 20분 먼저 나갔다가 정각까지 사람이 오지를 않아서 2시 30분의 다음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광화문의 까페 '숲속'으로 갔다. 워낙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아 외출도 드물기 때문에 시내에 나가는 날이면 30 분 간격으로 줄줄이 시간 약속을 하고, 그래서 한 군데서 지체하면 연달아 약속이 어긋나기 때문에 정시에 만나 10분 안에 일을 끝내고 다음 약속 장소로 옮기 기가 보통이다. 나는 그날도 여지없이 약속 시간이 되자 다 음 장소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학원사 사람은 2시 10분에 고려당에 도착해서는 오히려 내 가 늦은 줄 알고 한참 기다린 다음에야 내가 다음 약속 장 소로 간다고 알리는 메모를 남겨놓은 것을 보고 부랴부랴 돈을 들고 광화문 숲속으로 쫓아왔지만, 그때 나는 이미 세 번째 자리로 이동한 다음이었다.
시내에서 일을 다 보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와 11시 30분이 되어서야 학원사 사람과 전화 연락이 되었는데, 상대방 왈 "세상에 돈 받을 사람이 도망 다니는 건 처음 봐요."
나는 어느 누구라도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용서 하지 않는다. 약속은 계약인데, 계약을 안 지킨다는 것은 범죄 행위라고 생각해서이다. 물론 '길이 막혀서' 늦었다는 변명도 나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즈음 길이 안 막 힐 때가 어디 있으며, 길이 막힐 것을 계산에 넣어 미리미 리 출발하고, 가급적이면 시간이 정확한 지하철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시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나 시간을 안 지키기로 유 명해서 '코리안 타임'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겨났던 민족이 니.... 사람들은 여유있게 살자면서 시간 어기기를 밥 먹듯 이 한다.
심지어는 어느 신문사의 여기자가 나하고 집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하고는 연락도 없이 안 나타난 적이 있다. 이왕 집에 있는 사람이니까 약속 시간쯤 무시하면 어떠냐는 생각 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인터뷰를 해도 연 락을 하지 않고 10분 이상 늦게 오면 그 사람에게는 인터뷰 를 거절하고 돌려보낸다.
나는 밥도 점심은 11시 30분, 저녁은 5시 30분에 정확히 시 간을 지켜서 먹고 원고 마감도 대단히 잘 지킨다. 현재 시 사영어에 연재하는 원고는 아예 3년치를 미리 써서 몽땅 주 었고, '국제신문' 연재 소설도 6개월치를 미리 써 놓았다. 그래서 약속 시간이 좀 남아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늦게 오 는 그런 사람들은 다음부터 아예 만날 약속도 하지 않는다.
내가 이 정도이니 부모보다 더 보수적임을 자처하는 아이들 은 어떻겠는가.
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을 때 대모가 늦게 온 것도 아니고 정시에 나타났는 데 아이들이 왜 미리 안 오느냐고 조바심 하다가 울음(쌍고동)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먼스터 가족이 시간 때문에 무척 골치가 아플 것 같지 만 그렇지 않다. 우리들은 3시에 약속을 하면 2시 40분쯤에는 이미 모두 만나 다음 장소로 가기가 보통이 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꺼꾸로 본다면 아무도 약속시간을 제대로 안 지키는 셈이다. 아이들이 대학을 다닐때는 식구 들의 행선지를 서로 알기 위해 집에다 게시판을 매달고 각 자 칸을 나눠 연락 사항을 적어놓고는 했는데, 아이들은 학 교에서 귀가하는 시간을 '4시 45분' 이나 '5시 14분' 하는 식으로 기록하고는 했다. 내가 봐도 14분이라는 시간 을 써 놓고 나가서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봄 미란이가 봄 방학을 맞아 독일에서 돌아올 때, 비 행기가 예정 시간보다 40분 먼저 도착해서 승객들은 마중 나올 사람들과 길이 어긋나거나 공항에서 멀거니 기다려야 할까봐 걱정했는데, 미란이는 동행한 승객에게 그랬다는 것 이다.
"40분쯤 먼저 도착해도 우리 아빠는 공항에 나와 계실거 야."
물론 나는 나가 있었다. 공항에는 항상 한 시간 미리 나가 기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절대로 약속을 하지 말 것이며 일단 한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키라고 했다. 지금처럼 촌음을 아껴 써야 하는 바쁜 시대에는 목숨 을 걸고 시간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p.s
약속지키자고 말하는 거야 당연한건데, 쫌 어째 피곤하게 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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