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지망생 친구 이야기
나옹
난 어렸을 때부터 '숫자'는 '등수'는 무기가 된다고 생각했어. 이 사회의 원리는 자유경쟁이고. 숫자는
편견 없이 실력을 드러내주니까.
장남에 장손이라는 이유로 나보다 세뱃돈을 많이 받는 남동생을 시샘하면서, 인정을 받기 위해 동생보다 높은 등수를 잘 받아야지.. 유치한 경쟁의식을 키우기도 했고.
신문에 남성도 되기 힘든 고시에 감히 수석으로 합격한 '모범생' 언니를 보고 몰래 마음속에 스크랩을 해놓기도 했지.
남성이 대부분인 전문직에서 거리낌없이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는 어떤 멋드러진 상사 아줌마를 보면서.. 역시 전문직은 합리적이야 라고 굳게 믿었더랬다.
여자 운운하는 사회, 여간 찔러서는 여자인 내가 드리밀 구멍하나 없을 것 같은 그런 사회에서, 내 실력을 드러내주는 숫자 - '등수'는 딱딱한 골무처럼 내 손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었지.
결국 난 전문직인 의사가 되려하고, 지금 병원에서 수련중이야. 그런데 이상하게 수련성적을 나타내는 등수 한 켠에 주민등록 첫째자리숫자가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온거야. 우리 병원에서는 이상한 수학공식이 일반적이란다.
1 ≤ 80
"1등인 여자는 80등인 남자와 같은 경쟁력이라고 보면 된다."
아니 그보다 낮을 수도 있어. 만약 어느 과를 지원할 때, 전교 6등인 여자가 전교 100등인 남자와 부딪혔다고 하면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남자가 받아 들여 질거야.
아예 등수가 달리 매겨진다고 할 수 있지. 예컨대 전교 10등인 순이가 있다고 하자. 여자 중에서 꼴지라고 하면, 순이는 꼴등으로 취급받아. 전교 등수는 의미가 없어. 물론 1등 정도 하면 그래도 병원 쪽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거니 하고 동기인 여자애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하지.
이 이상한 수학공식은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나와 같은 여자애들을 짓누른다. 수업도 빠질 수 없게. 동아리 하나 선택할 수 없게. 수업을 안빠지니 당연히 필기를 잘하지. 그러면 탱자 탱자 놀았던 남자애들이 시험때 되서 손을 벌려. 빌려주고 나면 뒤틈으로 그러지. 여자애들은 필기와 암기는 뛰어나다고.
재활의학과와 비뇨기과의 경우, 정말 매일 학교 8시반까지 와서 10시까지 공부하고 시험때 꼴딱꼴딱 밤새운 여자선배와, 보통 때 널럴하게 수업도 거의 안듣고, 시험만 며칠밤 새서 보는 남자애들의 성적이 거의 같은 경쟁력을 가지는 거야. 물론 성적이야 여선배가 전교 30등 논 남자 선배야 전교 130등정도 되지.
숫자는 합리적이라고? 숫자는 등수는 논리적이라고 자처하는 남자애들한테나 합리적이겠지.
1 = 0
우리 병원에는 약 20여 개 과가 있어. 근데 그 중에 여자는 안 뽑는 원칙이 있는 과가 절반을 넘는다. 이를테면 내과, 피부과, 정신과, 방사선과, 임상병리과, 소아과, 산부인과를 제외하고는 여자는 '0' 즉 할당되지 않는 원칙이야. 그렇다고 열거한 과가 여자를 많이 뽑지도 않아. 소아과, 산부인과, 임상병리과와 같이 '보살피고 돌봐주는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과'만이 1명 이상 뽑지, 나머지 과는 1명씩 내부적으로 할당하고 있다.
물론 원칙상 여성을 비빌 수 없는 과에도 지금 레지던트나 fellow가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어. 그러나 원칙을 벗어난 것은 '예외'일 따름야. 이들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것이지.
병원만 그러겠니. 미성년자 성매매행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종암서장도 경찰서장 중 하나가 아니라 거의 연예인에 가까운 취급을 받쟎아. 얼마전에 '멋진만남'에서는 내기에 실패한 진행자가 벌칙으로 '종암서장'으로 분장하고 놀림을 받더라.
남성의 자리에 끼어든 여성은
통계상으로는 '한명(1)' 이지만 실제로는 '없음 혹은 예외(0)'인 셈이야.
여자를 안 받는다고 광고하는 대부분의 과는 표면적으로는 '힘'의 크기를 운운하지. 하지만 의사를 키우려는 것이지 도살자나 차력사를 키우는 것은 아니쟎아? 물론 수련생활이 힘든 것은 알지만 이것은 과정이쟎아 그 정도 참아줄 인내력은 있다. 결국 안뽑는 이유는 모호한 신화 - 예컨대 모과 과장이 죽으면서 "내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 여자는 안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둥의 그런 개인과 집단의 선호도 문제 - 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이런 대표적인 과는 외과계열이야. 신경외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성형외과 등. 아! 이비인후
과도 여자가 하나도 없다. 정형외과 쪽에는 레지던트가 간간히 있는데 매일 푸시업(push-up)을 해서 체력을 과시하거나, 남자랑 똑같이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넥타이를 메고 다니기도 하더라.
의대는 여자를 의사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0 = 1 = 10) ≒ 250
차라리 여대를 갔었으면 한다. 요즘 들어서는. 적어도 여대에서는 여자가 의사되는 것을 예외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없으니까.
어느 남자 선배가 화를 내면서 여자들 때문에 병원 월급이 내려간다고 그러더라. 어떤 선배가 병원에 원서를 냈는데 희망수입란에 10원, 1원, 0원을 썼다고 하더라. 보통 200만원 내지 250만원 이상은 받는데. 일하고 싶어도 받아주지 않는 병원에서 단 몇 년 후라도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을 한 그 선배들에게 동감이 된다.
물론 나는 그런 짓 안 할거야. 내 일하고 일한 만큼 대접받고 싶으니까. 그래서 갈 곳이 안 생긴다면? 모르겠다.
난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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