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차 (여 니)    

   "늦게 다니지 마라"
   집을 나설 때면 등 뒤로 들려오는 말이다. 늘 조금은 흘려버리고 마는 말이지만, 어쨌든 나에게 귀가시간이라는 강박관념을 안겨주는 말이다. 우리집이 무슨 대단한 귀족집처럼 엄격한 규율을 가지는 집안도 아니건만, 그래서인지 꼭 꼬집어 몇 시가 귀가시간이라고 정해놓는 규칙은 없지만서도, 12시를 넘긴다든지, 어제도 늦고 오늘도 늦었다면 꼭 한 소리 듣기 마련이다.
   일찍일찍 다니라는 말은, 집안에서만 듣는 목소리는 아니다. 온통 세상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한다. TV가, 신문이, 어둠침침한 골목길이, 세상의 다른 아저씨들이...
   여자애가 왜그렇게 밤늦게 쏘다니냐고, 여자는 집안에 있어야 한다고, 밤길은 무섭다고...

   얼마전 늦은 시간에 집에 가는 길이었다. 버스를 타면서 밖을 내다보니, 북적거리는 거리에서조차도 내 또래의 여자애들은 다들 팔짱을 낀 채로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주머니에손을 찔러 넣고 느긋하게 걸어가고. 하나같이 가슴을 쫙 펴고 말이다. 화가 났다. 누가 우리를 걸어다니기에도 무섭게 만드는 걸까... 왜 쫓기듯이 종종걸음을 쳐야 할까?
   그리고, 골목길을 돌아서던 때, 한 어린 남자아이와 마주쳤다. 난 그애가 너무 이상해보였다. 그애는 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보이는 아이였는데, 신나하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와~ 쟤도 저렇게 당당하게 걸어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범죄자모냥 종종걸음을 쳐야 하는거냐? 나는 법정 미성년자의 나이도 분명히 넘겼는데 말이다. 물론 미성년자가 밤길을 다녀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 애와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밤길을 다니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보았는데, 단 한 가지를 빼고는 나에게 더 불리한 이유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던 데에서 화가났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단지 어떤 이들만이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 그 속에서 어떤 이들은배제되고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사실.

   왜 그렇게 밤에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은지 모르겠다만, 시간표에 맞춰 꼼꼼히 살지 못하는 나에게는 밤의 무한한 시간(제대로 말하자면 왠지 무한할 것 같은 시간)이 많은 의지가 되기도 하고, 뭔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 밤이라는 시간의 부드러움이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밤길을 혼자 걷는 것은, 또한 때론 즐거운 일이다. 진한 보랏빛의 밤하늘 아래서, 예전처럼 하늘 가득 빛나는 별들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뿌연 연기를 뚫고 살아남아 있는 별빛을 찾아보는 건 가슴 한편에 생각을 담게 하는 일이다. 또, 낮의 탁탁한 먼지들 속에서 끈적끈적하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시선이 없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밤길의 매력이다. 예쁘게 다리모아 걷지 않아도 되고, 늘 걱정되는 내 엉덩이에 닿을 시선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그냥 휘적휘적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내 방이 아닌 바깥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걱정하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것. 그럴 때 나는 이 골목 전체의 주인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밤길을 이런저런 나의 하루일을 생각하면서 걷고 싶다. P*수첩에서 나오는 선정적인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예전에 밤길에서 생겼던 불쾌한 경험들을 생각하며 걷고 싶지는 않은것이다.

   그래, 나도 좀 마음편히 길을 걸어보자하고 생각해본 것이 나의 무기이다. 나에게 두려움과 금기의 시공간인 밤길에서 내가 가슴펴고 다닐 수 있는 어떤 방패와 같은 것? 그렇다고 나에게 어떤 비장의 무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밤길을 걸을 때,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이 뭘까? 뭘로 때리고 도망가야하지...' 하고 고민한다.
   예를 들면 긴 우산과 같은 것이 있을 때 나는 왠지 마음이 편하곤 했다. 접어서 가방 안에 들어가는 우산이 훨씬 편하지만, 긴 우산을 달랑달랑 손에 들고 가면, 별로 밤길이 무섭지 않았다. 우산이 뭔가 의지할 것이 되었다고 할까?    가방도 때로는 무기가 된다. 나는 보통 숄더백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적당히 무거운 이 숄더백을 밤길에서는 어깨에 매지 않고 손에 길게 들고 다니는 것이다. 중고등학교때는 도시락가방(특히 긴 끈의 보온 도시락통)이 좋은 무기가 되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하나, 살 때는 정말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핸드폰이다. 느글느글하고 마음약한 놈들이 따라올 때는 핸드폰으로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떨어진다. 통화료가 좀 걱정이 되면 그냥 핸드폰을 열고 혼자말을 해도 좋다. 좀 무서운 놈이 따라오면 집전화를 아는 친구와 통화를 하는 것도 괜찮다. 집근처의 골목길이라면 좀 더 안심이 되니까. 이외에도, 핀, 머리빗, 열쇠꾸러미, 열쇠꾸러미에 달린 호루라기 등도 무기로 쓸 수 있다고 한다. 또, 가스총을 구해가지고 다닌다거나, 호신술을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무기들로 내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잘 갔다든지, 나쁜 놈들을 혼내준 적은 별로 없다. 또한 이런 '실질적'인 무기들로 모든 나쁜 놈들에게 겁을 줄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리고, 그들을 때려주고, 혼내주고,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함도 안다. 하지만, 이런 무기들이 나의 두려움과 조바심, 위협감을 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 내가 이것들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나의 행동제약을 얼마간 풀어주고, 내가 세상과 만나고부대끼고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더 열어준 것 말이다.
   이런 무기들을 생각하면서 더불어 느끼게 되는 것은, 얼마나 성폭력에 대한 위협이 나의 행동을제약하고 있었는가이다. 끝없이 조심하고.. 위축되고, 나의 시간과 자유를 빼앗아가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무언의 통행금지를 내리는 이 사회에서 나는 남자들의 통행금지를 꿈꿔본다. 앞으로 100년간 그들에게 어둑어둑한 시간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길에 대한 금지명령을 내린다해도, 여성들이 겪어온 삶의 제약을 다 경험해볼 수 있을까.
   갇혀있을 것만을 강요받았던 우리들이 어떤 것으로 그 울타리를 부술 수 있을지, 우리들의 무기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해봤으면 좋겠다. 그것은 아주 크고 훌륭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들만의 무엇이라면 좋다. 그것들로 우리들의 힘으로 울타리를 부숴버릴테니까. 당신이 가진 무기를 소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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