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려서 몸이 찌뿌둥하다.
이런 날이면, 원하진 않지만 매사가 부정적으로 보인다.
그런 걸 알고 있고, 그러지 말아야지 해도, 어느 순간, 화락하고 머리꼭대기에 불이 붙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 못마땅한 모든 일에 대해서.
억지 웃음을 띄고 있는 그녀에겐 정말로 화가 많이 났다.
이 일에 대해 불만이 많고 할 말이 많을 것이 분명한 그녀가 내 앞에서 억지 웃음을 띄고 평소에 하지 않던
존대를 하며 비아냥이 섞인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웃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 역시 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 솔직한 의견을 털어놓을 때마다 “그건 사태해결에 도움이 안 되고~” 라는 말에 부딪혀서
돌아오는 의미들을 다시 줍다가 한숨을 쉬게 된다. 안다, 나도 안다, 나는 네가 동지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너한테 그걸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 알지 않느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단
잠시 참기로 한다. 너는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나한테 미루는 걸 곧장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까 괜히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니냐... 네가 네 일을 지키겠다면, 나 역시 내 일을 지키겠다, 라고 오래 전에
버렸던 유치한 마음을 다시 꺼내서 보호복 마냥 입어보지만 나빠진 기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도대체 언제적 기억인지 알 수 없는 더러운 기억 하나가 머리 속을 맴돌며 신경을 긁어댔다. 나는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다.
“좀 더 여기에 있고 싶어(특히 너랑 같이).”
얼굴이 없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만 가자, 너무 늦었어(나는 너랑 있는게 피곤하니까).”
나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나는 여기에 더 있고 싶으니까, 너 먼저 가렴. 신경 쓰지 말고(제발 내 마음 좀 알아줘).”
“그래, 나 먼저 가볼게(못 갈 줄 알아?).”
얼굴이 없는 그 사람, 자리를 뜨는 표정 역시 읽을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혼자 남겨진다. 사람들이 가득한
까페, 나는 속으로 말한다, 이게 아닌데, 너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였는데.기분이 더럽다. 눈물이 가득
고인다, 더 나빠진다. 하지만 따라나가서 애원하거나 실은 나도 갈거였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뜨는 것 보단
낫다고 자신을 달래며 참고 있다.
도대체 언제, 누구에게 이런 말을 했었는지 알 수 없는 기억이다. 어쩌면,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이런 짓을
반복했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지난 밤의 악몽의 스토리였을지도 모른다는 게 한 가닥의 희망.
내가 솔직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솔직해지기 시작하면 나를 지치게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을 믿더라도, 필요이상으로 솔직해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상대방에게 투정처럼
들리기도 하고 책임지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그 상황에 못 견디게 만든다. 돌아오는 건 자괴감 뿐인데…
‘그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참으로 무섭고도 어리석은 말인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그 사람의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어떤 종류의 체념을 포함한 말이라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심각한
종류의 부담을, 짐을 지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짐을 서로가 나누어 지는 일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라서 미천한 우리에게 쉬운 일이 아닐 거다.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거다.
몸이 흐리고 날씨가 찌뿌둥한 날.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절대 그냥은 못 지나가는 그런 날.
모든 (나에게) 무심한/ (내게만) 인정머리없는 인간들에게 너도 몸 한번 아파 보라고 저주를 하지만, 그
인간들이 나처럼 자주 아픈 것도 아니고 아파서 이런다는 걸 이해해주지도 못 한다는 거 알고 있다. 몸이
아픈 걸 정신력으로 이겨내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겠지. 정도의 차이겠지만, 나 역시 인정머리 없고 무심하며
그들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실은 웃기는 일이라는 걸 안다. 알면서도 편의적으로 그 칼을 들어
사용한다는 건 잔인한 일이라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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