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 일기 :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싸움, 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서도 거의 대화불가상황에 처해서 화가 나서는 마구 말을 끊고, 버럭 화를 냈다.

대화의 발단은 버피를 못 본 동거인에게 줄거리를 묘사하는 것부터였다.
앤젤을 죽여야 했던 버피의 상황을 묘사하고
-지옥의 소용돌이가 앤젤의 뒤쪽 악마석상의 머리 위로 솟구치고 있었고, 그 소용돌이가 더 넓어지기 전에 앤젤을 죽여야 상황이 종료된다. 그 소용돌이는 덮어버린 모든 곳을 말 그대로 지옥으로 만드는 그런 거였다-
버피가 앤젤을 죽였음을 중계한 다음이었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어?'라고 물어 열받게 하는 거다.

난 사실, 버피와 섹스한 후 잔인무도한 뱀파이어로 돌아간 앤젤의 묘사에 나름대로 신이 난 데다가
- 이것에 열광한 것은 거의 전형적인 연애관계에서 남성이 돌변하는 시점이 뭐 그런 때가 아니었을까, 굳이 저주받은 뱀파이어인 앤젤이 아니어도 남자들은 변하니까, 류의 상투적인 묘사와 딱 들어맞는 것 때문이었다. 이건 꼭 맹랑한 마녀가 '어, 당신 잠자리를 가진 다음 그가 변했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당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남자는 저주에 걸렸던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상 죽여야 하는 시점에 다시 저주가 작동하여 선량해진 앤젤에 대하여 대화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작별의 순간이나마 사랑했던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 다행일까, 죄책감없이 살해할 수 있는 잔인한 뱀파이어로 남아있는 것이 좋았을까?'였다.


내가 버피를 좋아하는 건
그게 허무맹랑한 판타지란 건데 말이지, '그게 너라면 그럴 수 있어?'라고 묻다니 열받나, 안 받나.

"내게 그런 상황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죠"
대충 넘어가려는데 끈덕지다.

화를 내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다른 질문.

"지구가 내일 멸망하면, 넌 무얼 할래?"

"나? 아마 못 믿고 살던 대로 살걸."이라고 답한 순간 화를 낸다.

"믿어, 믿는다고 가정해야 질문이 되잖아." 그러면서 계속 묻는다.

그 질문에 자신은 "어, 그래, 그러고는 똑같이 어제와 같은 하루를 아마 살지 않을까?"라고 답하면서 왜 나의 대답이 진지하지 않다고 말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난 여기서 믿기로 결심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
그리고 믿기로 결심했다면, 땅을 파기 시작하던가,
우주선 표를 예매하던가,
딥 임팩트 같은 상황이면 산으로라도 갈 거야!

다음 삶이 구질구질하다고 내일 죽음이 닥칠 걸 알면서 누워서 티비나 보겠다구!
그게 말이 되?난 살 거야.
그땐 다 거지니까 상관없어.
나처럼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라도 더 남았으면,
둘이 궁리해서 살면 되니까, 악착같이 살 거야!
그건 구질구질한 것도 뭣도 아니라고.
지금 전쟁이 난다 쳐.
어차피 세계 각국에 핵무기가 있고, 전쟁은 곧 인류의 멸망이라고 믿고 있어,
그런데도, 아무도 내 몸에 총을 겨누지도 않고, 나를 죽인 것도 아닌데,
핵폭발 후 지구가 방사능 낙진에 오염되어 죽어갈 게 두려워 자살이라도 할 거야?
피난도 안 갈 거야? 왜 그게 구질구질해! 살아남아야 될 거 아냐!"

(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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