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와 그녀가 만났을 때 (공간, 질서, 사랑의 불협화음)     
    - 에릭 로메르의 사계 연작 중 <봄>을 보고    
  • 시바

    우리의 주인공은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30대 초반의 여자. 프랑스 버전의-다시 말해서 보다 인간다운 기품이 서려있는-데미 무어처럼 생겼다. 그녀는 질서가 인생과 영혼에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녀의 질서잡힌 아파트-책은 가지런히 꽂혀있고 침대시트는 말끔하게 개켜져 있고 베란다의 꽃들은 싱싱하다-는 사촌이 잠시 빌려 머물고 있고, 그녀는 남자친구의 무질서한 아파트-옷가지가 곳곳에 널려져있고 식탁위에는 먹다남은 음식 찌꺼기, 책상 위에는 책들이 쌓여 있다-에 버려져있다 남자친구는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없는 남자친구의 아파트, 무질서를 자신의 질서로 삼은 살아있는 한 인간,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빠져나간 그의 공간을 가득 메운 무질서를 견딜 수가 없다. 자신의 집, 자신의 질서잡힌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사촌은 조금 더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집이 두 개나 있는데 돌아갈 곳이 없는 나."

    그래서 간 파티, 지루한 파티, 아는 사람 없는 파티에서 그녀는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커다란 집, 너무 커서 혼자 있는 것이 점점 더 싫어지는 집에 살고 있다 소녀의 엄마아빠는 이혼을 했고, 소녀의 아버지는 자기 딸만한 여자친구와 함께 살면서 직업 때문에 늘 출장 중이고, 소녀는 자기 아버지 나이의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다 남자친구가 데려온 파티 갑작스레 일이 생긴 남자친구는 가버리고 소녀는 나에게 오늘밤의 잠자리를 제안한다.

    "혼자 있는 게 정말 싫어요."

    소녀는 피아노를 치는 아이다 나에게 슈만의 '새벽의 노래'를 쳐준다 소녀의 엄마는 아버지가 예술가가 되기를 바랬다 더 자유롭고 더 열정적이고 더 격렬한 삶에 대한 갈구 그러나 아버지는 천재가 아니었고 언제나 무언가를 쓸 거라고 공언하면서 주제는 계속 바뀌었지만 끝내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아빠는 결국 예술가도 관료도 아닌 그 중간의 애매한 직업-'젊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행정 프로젝트의 책임자'-에 갇힌다 마흔살 남자로서 좋은 나이죠 아빠가 만나는 그 젊은 여자가 아빠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보다 아빠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게 훨씬 많죠 소녀는 눈부신 금발과 장미빛 뺨을 하고서 이미 늙은 여자처럼 심술궂다

    다음날 소녀가 학교에 간 새, 나는 소녀의 아버지와 맞닥뜨린다 자기의 방에 있는 타인을 보고, 자기 집에서 가장 타인인 사람이 자신임을 깨달은 소녀의 아빠는 황급히 물건만을 챙겨 나간다 우디 알렌의 좀더 키 큰 유럽 버전인 소녀의 아버지. 나약함과 예민함과 예의바름과 우유부단함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어서, 사람을 끈다

    "나는 아름답고 불같은 여자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에 지쳤어요 내 아내도, 내 딸도, 지금 사귀고 있는 젊은 여자친구도 모두 정말이지 감정적이지요. 난 언제나 보다 이성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었소"

    사촌은 좀처럼 떠나지를 않고, 남자친구는 여전히 여행중이고, 소녀의 집에서 좀더 머물게 된 우리의 주인공. 소녀와 아빠와 그들의 애인들 사이의 드라마. 처음엔 방관자였다가 차츰 그 속으로 얽히게 되는 구도. 소녀는 떠난 뒤 연락이 없는 엄마가 보고 싶고, 아빠와 멀어지는 것이 두렵다 소녀는 사랑받고 보살펴주어야 하는 아직 어린애.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 소녀에게는 안정이, 약속이 필요하다 하지만 소녀의 남자친구는, 나이많은 남자친구는, 아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 그래서 결국은, 사랑하는 타인. 떠난 엄마에게 손내밀 수 없고 혼자서도 힘들어하는 아빠를 이해하는 소녀는, 친절한 타인, 나에게 매달리고, 아빠의 젊은 여자친구를 미워한다.

    "그래, 어쩌면 무질서한 지금의 남자친구보다, 자신만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당신(소녀의 아빠)이 더 좋을지도 모르죠"

    소녀의 아빠와 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 어떤 가능성. 하지만 마침내 사촌은 떠나고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집, 자신의 공간, 그 질서잡힌 세계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녀가 떠나는 것에 당혹스러운 소녀는 마음을 닫으려 한다. 화내고, 울고, 소리지르기. 이별보다는 차라리 절교를. 그 순간 발견되는 잃어버린 목걸이. 소녀의 아빠가 소녀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할머니의 유품, 사라졌던 목걸이. 아빠의 여자친구와 소녀가 서로를 의심했던 갈등의 상징물이, 기적처럼 나타난다. 누구도 범인이 아니었고, 소녀도, 아빠도, 아빠의 여자친구도, 어떤 악의도 없었고, 그저 우연히 목걸이는 아버지의 바지주머니로부터 구두상자 속으로 떨어져 오랫동안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을 뿐.

    그 소박한 기적,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 해답 앞에서, 소녀는 불현듯 그동안의 미움, 엄마아빠의 이별이 준 상처, 그 앞에 무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혼자서도 절대로 외로워해선 안 된다는 자기 마음 속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껴안고 운다.
    활짝 웃으면서 흘리는 뜨거운 눈물. 나도 운다. 나의 질서, 나의 논리, 나의 세계, 나의 공간 속에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오만. 아마도 소녀가, 혹은 어쩌면 소녀아빠의 여자친구가 꾸며낸 촌극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코웃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결국 이들은 모두가 무죄. 질서는, 내가 질서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꼭 진실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남자친구의 아파트로 돌아간다 내가 왜? 내가 왜 이 무질서를 대신 덮어써야 하는가, 라고 물으며 자기 뒤로 문을 탕 닫고 그곳을 떠났던 그녀는 하나의 잠정적 대답을 겪었다 그리고 널려있는 옷가지를 치우고, 시든 꽃을 버리고 봄을 알리는 향그러운 꽃을 화병에 꽂는다 자신의 질서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무질서를, 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섞어보기로 한다 어떤 희망을 가지고 기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래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희망, 이란 게 도대체 무언가? 믿음, 이란 건 또 당최 뭐란 말인가? 사랑은 무엇인가? 나는 설날아침 차례상에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보았고, 젊은 사람들끼리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집을 사는 것을 축하해 주었고, 겨울바다 쪽으로 우산도 없이 눈맞으며 뛰어가는 친구의 고등어처럼 푸른 등을 보며 행복했으나, 여전히 혼자 깨어있는 밤이 오면 고독하고, 절망하고, 불신한다. 구경꾼 인생이기 때문인가? 이기주의자의 숙명인가?

    이 영화에는 없음(부재)으로써, 그 있어야 할 자리(현존)를 강하게 드러내는 숨은 주인공 두 명이 있다. 소녀의 엄마와 주인공 여자의 애인. 그들의 공통점은, 이를테면 단군신화 속의 '호랑이'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쑥과 마늘의 100일 후 보상을 받는 것보다는, 햇빛 찬란한 바깥 세상으로 오늘 뛰쳐나가고 보는 것이 이들의 성정이다
    . '희생'이란 금지된 낱말을 입력하면 따운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이들의 시스템이다. 소녀의 엄마는 남편의 엉성한재능과 삶의 뜨뜨미적지근함을 뒤로 하고, 젊은 건축가와 떠나버렸다. 주인공 여자의 애인은, 흐트러진 아파트와 반듯한 애인을 남겨두고, 출장을 혹은 여행을, 어쨌든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그들은 자신의 리듬을, 자기 별이 들려주는 음악에 맞춰 자신의 스텝을 밟으면서, 자신의 질서를 찾아간 것이지만, 그 결과 소녀와 여자,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혼돈, 에 빠져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라고 묻지만,(엄마와 애인에게는 옳은 일이고, 소녀와 여자에게는 부당한 일이고, 엄마-소녀와 애인-여자의 관계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런 물음은 누구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안된다. 그 사실은, 거기, 견고하게 놓여져 있다.

    이 영화에서 모든 중심 인물들은, 각자의 집을, "우주에 둥둥 떠돌고 있는 독방"(김승희, <달걀 속의 生>)처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감옥이자, 숨을 곳이며, 각자의 영혼이 처한 막다른 골목이다. 그래서, 공간을 섞는 것은 살을 섞는 것보다 어려운 일. 한바탕의 눈물과 포옹 뒤에, 조금은 키가 자란 그들.....의 삶은 계속된다. 소녀는 아마 돌아오지 않는 엄마와, 아주 젊은 여자친구를 둔 아빠와, 아빠만큼 나이먹은 남자친구와, 자신의 피아노 사이에서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불안정하지만 아주 예민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영혼이 망가지지 않고 살아남기를 기원한다. 우리의 주인공 여자는 자신의 아파트에 가방을 부려놓고 조만간 여행에서 돌아올 애인의 집을 정리하러 돌아왔다. 파괴적인 자유 성향을 지닌 그녀의 애인과 강압적인 질서 지향을 가진 그녀가 사랑 안에서 서로를 구원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소녀)와 그녀(우리의 주인공 여자)가 가끔가끔 만나고, 이야기하고, 오랫동안 서로를 지켜봐주는, 때로는 아침식사를 함께 하는 보석같은 친구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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