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두 입술을 열어라-성폭력 사건의 공개에 관해

헤마

내가 무슨 권리로, 한 사람을 감히 모든 사람 앞에 공개하여 '인생을 조지게' 만드는가/만들었는가.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 헌신적이고, 용감하고, 존경할 만한, (성폭력을 당한 몇몇을 제외한) 모두의 희망이고 둘도 없는 동지였던 '그' 사람을. 아니, 꼭 그가 훌륭하지 않더라도, 그저 그런 변변찮은 놈이더라도, 그보다도 못한 놈이더라도 모든 사람 앞에 이름 석자를 내걸어 손가락질 받게 만드는 것.

나도 정말 피하고 싶었다면 믿을까? 피를 원하는 군중들에게 보란 듯이 무참하게, 잔인하게 목을 치던 중세의 공개사형이 나에게도 떠올랐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행하던 나 자신이 사형집행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는 것, 그것을 사람들이 믿을까? 누군가 그 일을 대신해주었더라면 하고 천번도 만번도 생각한다는 것. 아니 이렇게 말고 좀더 아름답고 깔끔하고 우아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하고.

그러나 당신들이 알까? 아마 두고두고 가져갈 죄책감을 감수하고라도 나는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어쩜 당신들은 이것을 '복수'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나와 그녀들은 비이성적으로 날뛰는 '복수녀'라고. 100인위가 했던 일은 시대의 '복수극'이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제 이게 복수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보는 사람이 그렇게 본다면 어쩌겠는가. 다른 문제에서는 피해자가 피해를 보상받고자 하는 일을 정당한 권리찾기라고 부르지만 성폭력에 있어서 만은 이런 노력을 모두 복수라는 말로 일축하는 당신들이니. 그리고 당신들의 시나리오에서 여자는 복수 밖에 할 수 없으니.

'입막음을 위해 강간했다' 바꿔 말하면 강간을 하면 입막음이 된다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모든 성폭력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즉, 성폭력은 그 행위로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신체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히는 측면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서 피해자로 하여금 피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게 만든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피해자는 성적 자율권의 침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침해를 고발할 수 있는 고발권도 동시에 빼앗긴다. (물론 법적으로 그것을 내놓고 빼앗진 않는다.) 그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당신의 머리로 생각해 보라. 피해자의 피해가 '차마 말할 수 없음'에 있다면 그 피해를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지?

성폭력의 해결은 피해자의 치유와 가해자 처벌, 재발 방지에 있다고 한다. 사실, 당신도 나도 성폭력의 진정한 해결이 뭔지, 그런 게 과연 있기나 한 건지 잘 모른다. 참, 당신이 말하는 아름다운 해결의 모습이 있기는 하다. 피해자가 어머니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가해자의 '실수'를 용서하고 둘이 이전의 동지적 관계를 잃지 않는 것. 그럼으로 그들을 둘러싼 주위의 관계들도 이전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흘러가는 것. 그러나, 사실 속으로는 당신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 그럴듯한 그림은 피해자에게 또 한 번의 희생을 강요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사실 한 번이 아니라 희생은 지속적으로 영원히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건 가해자와 그 주변인물들에게나 아름다운 해결이라는 걸. 해결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피해자의 치유과정이 있어야 한다. 피해자의 치유는 피해자가 받았던 피해를 보상하는 데서 출발한다. 피해의 보상은 피해자의 육체적, 정신적 피해와 함께 '말할 수 없음' 에 대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자에게 목소리를 되돌려 주는 것. 그것이 성폭력 사건과 가해자 실명의 공개이고 사건 해결의 시작이다.

대다수의 성폭력은 은밀함 속에서 일어난다. 가해자는 그 은밀함이 자신에게 절대권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무의식적으로라도 깨닫고 있다. 성폭력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보증수표가 된다. 이것은 성폭력 사건의 악랄하면서도 중요한 지점이다. 이 지점이 성폭력범은 죽일 놈이라는 사회적 공식(나는 이 공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을 무색케 하며 성폭력 사건이 끊임없이 반복되게 하는 기반(!)이 되어오지 않았는가.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폭력 그 자체가 가해자를 더 이상 가해자가 아니게 만드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극복해 내는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성폭력 사건의 생존자들이 떨리는 입술을 열고 큰소리로 '나는 ***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얘기해야 하는, 얘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위협하는 눈, 온갖 비방의 글들, 법적인 고소, 뒤에서 쑥덕거리는 목소리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 있게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며, 그것을 서로 나누고, 이론화하고, 다시 자신을 세워내는 그녀들이 더 이상 상처받고, 피흘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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