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어머니

별족

1. 모니터를 통해 낯익은 모습을 만나다.
늘 내 안에서 나를 힐난하는 목소리를 내는 그녀는 내 안 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서, 지금 다른 어떤 모니터 앞에서 '지금 누구를 생사람 잡으려 드느냐'고, '당신이 피해자이기 는 하냐'고 분개하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남성에게 티끌만한 상처를 입히느니, 내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오래 묵은 어머니는 그래도 적 당한 때 나서는 내 자신의 이성으로 인해 단지 내 입을 막 고 내 손을 묶을 뿐이지만, 누군가는 아예 내주고 말았구 나, 그 어머니 하는 대로 말해서 상처입히고 마는구나, 한 다.

2. 왜 어머니인가?
그런 모습, 여성이면서도 여성의 슬픔이나 공포를 애써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내 안의 '가부장성'이라고, 그 런 '가부장성' 내 안에 차고 넘친다고 늘 조심하는 건 오래 되었다.
그 '가부장성'의 이미지가 엄한 아버지라기보다 철저히 그 제도에 속한 늙은 어머니라고 여긴 것은 딸기의 입에서 '어머니'란 말이 튀어나온 순간 떠오른 피디수첩의 할머니 때문이다. 그녀는 화면밖에 얼굴을 두고는, 강간당한 정신지체 여성을 무시무시하게 비난하였다. 그 년 때문에 마을의 몇이나 경찰서에 잡혀갔는지, 그 미친 년이 생사람을 잡았다고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3. 내 안에도 그런 그녀가 있다고 느낀 건 어느 때였나?
오래전부터 어렴풋하던 그 부끄러운 자각이 벼락 맞은 것처럼 화끈하게 닥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리가 늦어 임신일까 걱정하면서 였다.
그 때 내게 닥치는 이미지들에 당황하면서 알았다,
내 안의 그런 그녀, 정말 차고도 넘칠 만큼이구나.
피임에 실패한 여성이 얼마나 멍청하고, 이런 일로 상대방 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게 또 얼마나 뻔뻔하던지.. 지금까지 누군가를 변호하거나, 상황을 정연하게 해설하거나, 논리 적으로 입장을 옹호하려던 태도들 다 어디로 사라지고 몸 속의 흐르던 그 이상한 어머니가 모질게 나를 비난하기 시 작하였다.
'못된 년, 어디서 멀쩡한 사내놈 덜미를 쥐려고'
'멍청한 년, 잘난척 나대더니. 내가 뭐랬어, 결혼 전에 처녀 여야 한댔잖아, 당장 어쩔래, 똑똑한 척 하더니 꼴 좋다'
'착하지, 네 선에서 알아서 해. 그런 일로 귀찮게 하면 안 된다구'책임은 여성에게만 있지 않고, 그런 문제는 함께 나 눠 질 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선택에 법적 강 제도 또한 없어야 한다는 관찰자적인 입장의 매끈하고 단련된 사고는 모두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당장 닥치는 내 자신에 대한 비난에 한심해졌다.
남자들은 '아이로 덜미잡는 덜 떨어진 년'취급받지 않으려 는 어떤 여자의 안에서 아이가 생겼다 사라져도 아예 모 를 수도 있겠구나, 아무 일 없던 듯 다시 보거나 보지 않 거나 그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라는 자각.
내 안에도 오래 묵은 인습들이 피를 타고 내 몸을 흐르다 가, 멀쩡할 때 아닌척하다가는 이런 순간 닥쳐서는, 내 몸 의 고통이나 내 안의 불안이나 내 안의 슬픔따위 더 존귀 한 다른 존재를 위해 무시하거나 참으라고 하는구나, 라는 자각.

4. 피를 타고 흐르는 어머니를 의식적 노력없이 거스를 수 가 없다.
내 안에서 이미 '어머니'란 지위를 가진 탓에 산 처럼 쌓이는 죄책감을 피할 수가 없다. 눈물나도록 속이 상해서는 '왜 어머니는 내 편이 아닌가요?'할 밖에 도리가 억다. 어느 순간, '그 어머니 내 입을 빌려 말하고 있구나' 하는 자각에 깜짝깜짝 놀래도 아직 다른 누군가 상처입히 지 않았음을 혹은 더 심한 상처 입히기 전에 깨달았음에 안도할 따름이다.
지나간 다음, 나에게 닥쳐서야 자각하는 일이 여전하여도 조금씩 그런 깨달음 쌓여서, 내 몸을 그 이상한 어머니에 게 빌려주지 말아야지, 한다. 내 안의 어머니가 나를 비난 하고 있더라도, 내 밖에서는 다른 입들이 나를 응원하기 를 바란다. 나를 장악한 어머니를 물리치기도 버거운데, 당신까지 그 어머니에게 몸을 빌려준 다음이라면, 도대체 사방에서 나에게 향하는 비난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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