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나와 늙으신 아버지


부리

어떤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이 되게 다른 줄 안다. 웬만한 사람들이 그게 무슨 동(洞)에 있는 줄 아는 대학을 중간에 관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게 대학인 줄도 모르는 곳에 가겠다는 딸년을 그냥 두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분들은 아주 전형적인 '한국적' 부모다. 딸의 학적에 관한 위와 같이 '안 한국적'인 용납은 전적으로 우리 부모님이 극단적으로 '한국적'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길게 시간을 끌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deal-. <졸업하면 결혼할 것>, 그게 다였다.

어느 핸가, 아버지가 곱게 보내주신 학교에서, 영화 하나를 봤다. <만춘>이라는, 꽤 유명한 일본 감독의 영화다. 홀아비인 아버지가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려고 한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은 자기가 결혼하면 아버지를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되니까 결혼하기 싫다고 한다. 아버지 물 떠다드리는 것부터 온갖 시중을 다 들고 있던 딸이 가버리면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아버지의 상황은, 아닌게 아니라, 매우 심난해질 것 같긴 했다. 그래서, 아, 너무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갈등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딸을 사랑하니까 결혼시키려고 하고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결혼 안 하려고 한다. 결론은, 거의 자연적인 사회의 법칙대로, 딸은 결혼하고 아버지는 쓸쓸히 남는다는 거였다. 영화가 끝나고 토론이 되자 나도 쓸쓸히 남겨졌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격렬하게 경험했던 건 (그 사랑의 갈등이 아니라) 슬프고도 더티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 관객 여러분들은 아무도 동의해주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피치못할 갈등을 다루는 간결하고 운치있는 영화 화법, 소란하지 않지만 길게 지속되는 정서적 울림, 낯설고 독창적인 공간 감각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킨 미덕들을 나라고 왜 안 보고 싶겠는가. 그러나 쪼잔하게도 나는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다른 것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저 딸의 삶에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의 노예 상태에서 다른 노예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다, 오로지 아버지를 안락하고 기쁘게 하는 것에만 몰두했던 딸이 이제는 다른 남자를 위해 그런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이 다를 뿐.

우리 아버지가 이제는 늙으신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 그 분이 한 사람의 전 생애의 무게로 당신의 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챈다. 그래서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의 손을 잡고 모든 사람들 사이를 자랑스럽게 걸어간다'고 하는 아버지의 바램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천상의 기쁨으로 그려보는 그것이 나에게는 지옥의 입구로 향하는 길로 보이니 말이다. 나는 이 문제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생각해봤다. 아버지는 생각하실 것이다. 딸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갈 때, 이제 자기 일은 끝났다고 깨달으면서, 어렵게 공부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둘이서 고생하면서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작은 성취에 미소짓던 그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마무리 지어지며, 모두 보상받으며, 모든 짐을 내려놓으며, 스스로 행복이라고 믿었던 당신의 삶을 이제는 딸의 손으로 건네주면서, 그 삶이 다시 딸의 삶에서 조용히 반복되는 것을 기다린다면,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인생의 참맛이라고.
이 그림의 문제는 무엇인가? 딸은 아버지의 삶을 다시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행복하게 했던 방식으로 딸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봤다.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독립된 성인으로 자라나 행복해지길 바라시죠? 그러니까 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결혼을 하게 되면 예속된 존재가 될까봐 두려워요. 그러면 저는 행복해지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얘야, 누구나 혼자서 살아갈 순 없단다. 그러니까 그것을 예속이라고 받아들이면 안된다. 사람은 원하는 것만을 가질 수 없다. 양보하고 받아들이고 참는 가운데서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그게 정말 행복이다.
우리 아버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셨다. 그렇지만 딸에게는 그 단란한 중산층 가정의 행복이 자주 수치심이나 고통으로 와서 꽂혔다.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평생 생각했다. 내 딸은 나처럼 키우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다. 그게 두려운 거다. 내가 본 모든 여자의 결혼이 다 '나빴다'. 만약에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내 운명도 달라질 수 없다. 나는 자기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자기가 속할 사회를 다르게 선택하는 게 쉽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앞서 언급한 <만춘>이라는 영화의 감독인 오즈는, (그 자신은 가정을 꾸리지 않았으면서) 자기 영화의 대부분을 딸이나 그 비슷한 누군가를 결혼시키는 이야기들로 자신의 필모그라피의 많은 부분을 채웠다. 얼마 전 있었던 오즈 회고전에서 그러한 그의 영화 몇 편을 연달아 보고 있으려니, 어떤 사회에서는 딸(이든 그 누군가든)을 결혼시키는 일이 하나의 사회적 제의, 상징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가정이라는 하나의 단위가 세포처럼 모여서 형성되는 사회에서는, '결혼'이 성인식의 형태가 될 수도 있겠다고, 다시 한번 특히, 불행하게도 그 자신만으로는 온전한 인간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딸의 경우에는 더더욱.

아까 말한 그 학교에 다니려고 나는 아버지의 조건을 받아들였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심정으로, 언제나 '비혼'이 아닌 '미혼'인 채로 남아 있으면 약속을 어기는 것은 아닐 거라는 계산으로. 그렇지만, 나이를 한살 더 먹고, '결혼 적령기'의 최중심부쯤에 들어서면서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에 대해 전향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의미하셨던 '결혼'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고. 그건 아버지가 당신의 딸이, 독립적인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서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우리 부모님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다른 모델이 없었던 것 뿐이다.
사실 그러한 모델은 부모님 뿐만 아니라 나한테도 없다. 결혼은 해도 무섭지만 안해도 무섭다. 다들 가는 길을 안 가자니 아무데도 길이 없다. 정말 사람은 혼자서는 못 사는 것일까?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 더 쉬워지지 않을까? 결혼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할까? 뜻을 나누는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것은 몽상일 뿐일까? 꼭 부부의 침실을 중심으로 아이를 늘어놓는 것만이 가족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비슷한 처지에 있다보니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나와 내 친구들은(그러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달딸 친구들) 자연스럽게 '함께 사는 것'에 대한 망상도 나누기 시작했다. 결혼 뿐만 아니라 여타 문명적인 제문제들에 대한 많은 대답들을 포함하는. 그래서 우리는 생각했다. 만약 우리 엄마 세대가 결혼에 대해 반역하는 것이 '금지된 결혼' (중매가 아닌 연애를 통해 한다거나, 부모님이 반대하는 조건을 가진 남자와 한다거나)등으로 나타났다면, 지금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다고. 나는 (어머니가 반대하시는) 이 친구들이랑 살겠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함께 사는 집으로 어머니 아버지들이 딸들의 머리를 잡으러 오시고, 뭐, 이렇게 머리를 잡으러 오시는 것같이 충격적인 일이 있어야 딸이 당신이 제시한 결혼을 거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울지도 모르겠다.

모든 자식은 부모에 반역한다. 서로 다른 세대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 반역의 양상이 더 확연해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른 세계에 사는 우리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효도하고 싶다. 늙어가시는 우리 부모님의 삶에 위로가 되고 싶다. 희망이 되고 싶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내게 바라시는 단 하나의 것이 '결혼'이라니 참 어이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엇갈려야 하는 가! 왜 인간 세상은 이다지도 모순에 가득 차 있는 것인가!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이 글에 결론이 없을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사람 사이의 일들과 달리 글은 어떻게든 끝이 나야 하니까...어떻게든 끝을 내봅시다, 흠흠.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 부모님과 내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고 믿는다. 잘 사는 것, 사람답게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 만약 결혼이 최상의 길이라는 판단이 서면 그걸 하겠다. 쓸데없는 결혼 포비아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겠다. 그러나, 더 좋은 길이 있다면, 혹은 좋을지 어떨지 몰라도 꼭 그리로 가보고 싶은 다른 길이 있다면, 부모님을 잠깐 울리더라도 그 길을 택하겠다. 만약에 나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나는 걔가 그러길 바랄 테니까. 부모를 설득시키지 못하더라도, 자기의 행복(혹은 불행)을 택하는 것. 나는 반대하지만, 너의 앞길을 축복하겠다-사실 이거야말로 자식의 결혼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도 전형적인 부모의 반응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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