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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이

어느 스산한 밤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것처럼 굳게 닫힌 창 너머로 바 람소리가 가르릉 가르릉 거리고 있었다.
별족은 언뜻 바깥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따뜻하고 밝은 안에 있다는 것에 내심 흐뭇해 하고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 이건 본인의 생각이고, 사실 그녀는 바깥이야 어떻든 간에 일일연속극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이다. ‘정말 일일 연속극은 저리도 뻔뻔하지? 내가 연출이었다면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거짓말했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져서 부 끄러울거야. 정말 어지간히들 해야지. 세상에 저런 가정이 몇 %나 되길래, TV속이 사 실은 실재요 하고 저렇게 외쳐댄담’ 그녀는 강냉이 하나를 먹고, ‘너무 뻔하쟎아’
혹은 ‘너무 민망한데’를 연신하며, TV부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를 흥분하게 했던 일일드라마는 끝났고, 9시 뉴스 시작 CM이 경쾌 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강냉이를 먹으면서 반사적으로 옆에 놔두었던 책 하나를 집어들었다. 밤늦게 읽기에는 조금 무거운 책이지만, 그녀는 인내심을 시험 하듯이 꾸준히 읽어 내리면서, 간헐적으로 TV를 흘깃거린다.

“다음 뉴스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한 20대 후 반 여성이 집을 나간 뒤 행방불명입니 다. 외출을 한 후 캄캄 무소식이라고 합니다. 경찰은 요즘 유행하는 자살사이트와의 관계 여부를 수사 중에 있습니다.”

‘어 저게 누구야? 야옹이잖아?’ 별족은 화들짝 놀라서 TV앞으로 다가섰다.

TV속 사진은 야옹이가 사는 동네를 비춰주면서, 요즘 들어서 20대 후반 여성들이 행방 불명되는 것이 사회적인 경향이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를 떠들어대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별족은 다급하게 전화기 다이얼을 눌러, 차차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차야, 방금 뉴스 봤어?” “어.. 별족이셔. 왠일이야?” “글세 야옹이가 실종되었대.” “뭐라고? 정말야? 잠깐 KBS야? 맞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게.” “그러고 보니 요즘 야옹이가 우울해 보이기는 했어.” “설마 자살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어휴, 이럴 게 아니라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래”

전화를 끊고 괜한 걱정 말자고 다짐을 했지만, 별족은 걱정에 호기심에 밀려서, 수화 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전화 속에서 딸기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주말을 느긋하게 보내고 있는 중이리라. “별족이야.” “아, 너도 야옹이 뉴스 봤구나.” “응” 여느 뉴스와 다를 바 없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딸기의 태도가 수상하다. “여행 간 거겠지. 요즘 정신이 없으니까 머리 속 정리도 할 겸하고 여행을 떠난 것인데, 깜빡 잊고 행선지를 안 밝힌게 분명해.” “그런데 저렇게 호들갑이야?” “아냐아냐. 뉴스란 게 원래 그래.”

딸기의 자신감 있는 낙관에 잠시 수긍하려고 했지만, 솟아 오른 호기심은 여전히 가라 앉지 않았다. ‘무언가 고리가 빠져서 덜커덕거려. 언론의 호들갑과는 다른 이유든지, 목적이든지, 배경이든지가 있을 거야. 최근에 야옹을 만난 게 누구였더라. 맞아. 완 두.’

완두는 자다가 깨어났는지, 별족이 급하게 전달하는 내용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 르나 보다. “아함~ 야옹이 말야? 걔 요즘에 모교사랑 사이트에 자주 드나들던데. 초 등학교 아마 초등학교 동창회 나갔었을 거야. 왜 금요일 토요일 같은 때 동창회 많이 하잖아.”
그러고 보니까, 야옹이가 초등학교 친구가 쪽지를 보내왔다고 자랑했던 것이 생각났다 . TV는 사랑을 싣고를 찍고 싶나보다 비웃었는데, 만난다고 하는 날짜가 실종된 날짜 와 얼추 들어맞는다. 낌새가 수상치 않다. 별족은 이 작은 추적을 계속 이어간다.

별족은 야옹의 초등학교 친구 여경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상한 것이, 어떻게 별족이 이여경의 전화번호를 추적할 수 있었나 하는 점이다. 이 에 대해서는 별족이 야옹의 수첩을 입수했을 것이라는 설과 야옹이 관성적으로 사용하 는 아이디와 비번을 통해 모교사랑사이트에 접속해서 알아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 다.)
“여보세요.” 거만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저는 별족이라고 합니다. 야옹이 실종 때문에 묻고 싶은 것이 있어어요.”
“야옹이라.... 아! 초등학교 동창? 그 애가 실종되었나요? 세상에 별일이네. 언제 그 랬는데요?”
“아마 마지막으로 만난 분이 여경씨일 거 같은데 실종에 대한 단서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전화했어요. 동창회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여경이는 손톱 손질을 멈추지 않으면서, 양미간을 찌뿌리면서 야옹을 기억하려 애썼다 .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파시미나나 스카프와 같은 그 흔한 아이템 하나 없이, 다소 소박하고 단정한 차림새, 뭐라고 할까, 학생 같은 옷차림을 하고 저쪽 끝에 앉아 있던 실루엣이 떠올랐다.
“뭐 여느 동창회랑 똑같았죠. 몇 십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라서, 모두들 잔뜩 들떠 서 멋지게 차려 입고서 서로의 옛 모습과 비교하면서 웃고 떠들고, 뭐 하는지 물어보 고 명함 교환하고 술 먹고. 동창회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이제 여경은 줄칼로 손톱 손질하는 것을 마무리하고, 어깨에 전화기를 끼운 채 본격적 으로 매니큐어를 바르기 시작했다. ‘퍼플이 좋을까? 누드 베이지가 좋을까?’ 내일을 위해 준비한 침대 위의 옷과 화장대 위의 매니큐어 색깔을 눈대중으로 맞추어보던 그 녀는 야옹이가 특별하게 했던 말이나 두드러지는 행동을 했는지 물어보는 별족의 질문 을 놓쳤다.
“미안해요. 뭐라구요? 지금 손톱 손질하는 중이라서 못 들었어요. 알다시피 손톱 손 질이라는게 아주 섬세하고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하고 그렇쟎아요. .....” 별족은 수다스러움에 질려서 말을 끊는다. “방금 야옹이가 친구들과 특별한 말을 했었는지 물어보았어요.” 약간 짜증난 말투이건만 여경은 알아채지 못했다.
“네. 뭐 기억나는 특별한 대화는 없네요. 아 친구들이 야옹이의 피부를 칭찬했지. 야 옹이는 변한 게 없더라. 뭐 사실 의례적인 것이긴 인사 긴 하지만. 왜 오랜만에 만난 여자친구들은 너 예뻐졌다고 인사하잖아요. 조금 일찍 결혼한 친구가 있었는데, ‘난 너처럼 화장 안하고도 외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죠. 그 애는 쌍꺼풀 수 술 한 거 가리느라 어지간히 발라대야 안심이 되나봐요. 아참 그 친구와 통화해보세요 . 오정윤이라고 그애가 야옹이와 대화를 많이 했을 거에요.”

‘내가 손톱 손질에 대해서 알게 뭐람. 도대체 친구가 실종이 되었다는데, 아무리 오 랜만에 만나서 심정적인 동조가 안 일어난다고 해도 최소한 진지해줘야 하는 거 아니 야?’
별족은 여경의 성의 없는 태도에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다이얼을 꾹꾹 누르며 화 풀이를 해댔다.. ‘이번에는 무슨 소득이 있어야 할 텐데..’
“오정윤씨세요?”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야옹이 친구인데요, 야옹이 실종 때문에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잘 되었네요. 저도 방금 TV에서 보고 너무 놀라하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상했 던 게, 야옹이가 유달리 말을 별로 안 하더라고요. 어렸을 때는 쾌활했었는데. 성격이 바뀌었나 했죠. 지금 생각하니까 그게 아니었나봐요.”
이 말을 들은 별족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야옹이랑 무슨 대화하셨어요?”
“뭐 딱히 야옹과 많은 말을 했던 것은 아니에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기는 했지만. 걔는 가끔 끄덕이거나, 웃거나 할 뿐 별 대꾸를 하지 않았어요. 우리들은 한 네 명쯤 이었는데, 살아온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죠. 우리가 챙겼어야 하는 것인데 마음이 그러 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금이니까. 기억을 떠올려보죠. 가만있어 보자. 맞아 어디 로 이사가서 안보였는지 서로 물어 봤죠. 근데 세상에 알고 보니 다 비슷한 동네에 살 고 있었던 거 있지요? 이렇게 가까이 살 줄은 몰랐어요. 가끔씩 만나면 좋겠다고 입을 맞췄죠. 아 야옹도 저랑 같은 동네에 살더라. 그리고 대학 때 뭐하고 지냈는지 서로 물어보고, 어학연수나 유럽 배낭여행 갔다왔던 이야기를 했죠. 물론 연애나 결혼 이야 기도 빠지지 않았죠. 연정이란 친구가 있는데, 걔는 나랑 같은 관광회사를 통해서 유 럽에 갔는데도 나의 2/3 가격 밖에 안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참 억울해서.. 역시 여행 은 시기를 잘 타야 하나봐요. 아, 야옹이 대학 친구라고 했죠? 정말 야옹이 연애 안 해요? 그럼 내가 누구 소개 시켜줘야겠네. 이제 좀 있으면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힘들 거에요.”
“야옹이와는 몇 시쯤 헤어졌나요?” 별족은 별 참견이라는 듯이 딱딱하게 말했다.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렸네. 저랑 같이 한 11시 30분쯤 나왔지요. 요즘에 일이 많다고 피곤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집까지 태워다 줬죠. 같은 방향이니까. 야옹 을 바래다 주었던 친구가 있어요. 아무래도 밤이니까. 위험하쟎아요. 동준이라고. 연 락처를 가르쳐 주죠.”

전화를 끊고 난 별족은 머릿속의 회색 뇌세포를 빠르게 움직였다. .
‘실종시간은 11시 30분에서 11시 40분사이겠지 아마. 집 바로 앞에서 집까지 들어가 는 순간이었을 테니까. 근데 뭐가 찜찜해. 정말 수동적인 실종일까? 납치와 같은? 그러기에 야옹의 태도가 이상한데. 야옹 답지 않아. 침묵을 어떻게 설명하지? 무언가 다른 안 좋은 일이 있었나? 그런 일을 아닐거야. 그랬다면 아예 동창회를 안 갔겠지. 그럼 결국 동창회 자체의 문제인데’

“여보세요.” 조금은 사무적인 굵은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흐른다.
“김동준씨지요?” “그런데요. 누구시죠?”
별족은 사정을 설명하고 앞의 두 사람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무슨 이야기했냐는 말씀이십니까? 뭐 특별한 게 있을까요?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지 요. 저와 옆에 있던 수진이는 차를 길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아무래도 고 속도로에서 한 번 밟아 줘야, 차가 손에 익게 되더라구요. 안 그러면 오래 못타요. 왠 일인지 야옹이는 별 흥미가 없어 하길래, 화제를 돌렸죠. 야옹에게 어디서 일하냐고 물어보았더니 씨익 웃으면서 뭐하고 살지 못정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요즘 업계 동 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
별족은 ‘당연하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야옹은 면허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별족의 심뚱한 표정을 볼 수 없는 동준은, 전문가다운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
“한마디로 벤쳐붐은 거품이죠. 하여튼 우리 나라는 냄비 근성이 있어서, 뭐 하나 잘 된면 우루루 몰려가는 게 문제야. 저는 야옹이에게 조금은 큰 기업에 취직해서 정식교 육도 받고 경력도 쌓은 다음에 적성에 맞는 작은 규모의 직장에 가라고 권했지요. 요 즘 평생직장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못 말리는 컨설턴트이군. 이 치들은 본인이야 도움을 주는 거야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자기가 얼마나 많은 지식이 많으며, 자신의 사리분별이 얼마나 잘났 는지 과시하는게 큰 부류지.’ “제가 또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전화해주세요.”
그는 한 참 경제 전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무엇에 바쁜지 전화를 끊었다. 아마 경제 변동 때문인 것 같았다. 한 참 따분해서, 왜 전화를 걸었는지 조차 깜빡했던 별 족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별족은 어렴풋이 야옹이가 왜 없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야옹 그랬군. 이제 조금 있으면 돌아오겠군. 지금은 혼자 있게 놔둬야지.’

며칠 후 달딸게시판에서 야옹은 모습을 드러냈다.
‘십 여 년만의 초등학교 동창회. 수 백가지 다양한 삶을 살아도 시원치 않은 그 기나 긴 기간 동안, 십 수년간의 공통 경험이 없어야 할 친구들은 그렇게도 닮아가고 있었 다. 나는 점점 더 밀려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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