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에서의 강간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 전략

신 딸 기

 

#엘리는 너야

풀하우스는 첫 장만 넘겨봐도 끝이 보인다는 뭐 그렇고 그런 순정 만화일 뿐이다.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라이더와 엘리가 결국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아버지도 없는 동양 여자애가 영국 글래머들 사이에서 사랑하는 남자, 그것도 잘난 배우인 라이더를 놓고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는 그 투쟁에서 승리자가 누구인지는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그 싸움의 승리자는 당신 바로 당신이고, 당신을 닮은 여중생, 여고생, 여대생이고 여공이기도 하며 여자 회사원이며 미시 언니들이다. 엘리는 안 예쁜 우리를 대신해 우리들의 남자 친구 포르노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금발머리 글래머 매리이거나 혹은 우리들이 수십 번도 더 보았던 순정 만화의 전형적인 주인공인 금발머리에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가진 들장미 소녀 캔디, 금발의 제니, 아카시아, 샤르휘나 등과 라이더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여태 우리의 눈을 사로 잡아 왔던 그 금발 머리 여주인공보다 분명히 더 예쁘지만 못생겼다고 우기는 엘리(예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원수연의 미덕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엘리와 동일화 된 자신에 대한 평가는 '남들은 내 외모를 아니라고 얘기할 진 몰라도 난 사실은 예쁜(혹은 매력적인) 것이 틀림없어'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 훨씬 더 나처럼 느껴지고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에서나 보는 디카프리오 같은 남자를 만나게 된 나는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또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정답은 풀하우스에 있다. 바로 우리들은 엘리이고 엘리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엘리는 못생긴,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우리들을 대표해서 디카프리오와의 연애에 성공하며 우리들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연애와 그 뒤를 따르는 욕망, 두려움

일전에 쓴 글에서도 밝혔듯이 남한의 딸들에겐 연애란, 달콤하지만 언제 강간당할 지도 모르는 가시를 가진 장미와도 같다. 불행히도 엘리는 비록 몸은 영국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아직 미혼인 원수연의 화실에 있었던 것이다. 엘리는 자유 분방한 연애는 커녕 그의 소꿉친구 필릭스와의 관계가 그랬던 것처럼 연애에 대해선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 아니, 연애는 OK, 스킨쉽은 NO. 라이더와도 그러한 원칙은 아직까지 잘 지켜가고 있다. 그건 엘리조차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우리들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나의 첫번째 연애는 어땠는지, 당신의 첫번째 연애는 어땠는지 떠올려 보라. 그의 손이 나에게로 뻗어올 때 얼마나 숨이 막혔었는지 떠올려 보자, 그 숨막힘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 지 떠올려 보자. 그 원인이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할 수 있는 흥분이었는지, 강간당할 지도 모른다(혹은 강제로 섹스를 하게 될 지도 모른다 ) 는 두려움이었는지 말이다.

나의 경우는 반반이었다. 사실, 나의 경우는 밤길에 마주치는 남자와도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그가 나를 강간하려고 하면 어떡하지? 그 때 내가 떠올린 강간은 영화에서 본 섹스였다. 강간이 섹스였고 섹스가 강간이었으며 내겐 연애를 하는데 걸림돌로, 두려움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나에겐 손잡는 것도 팔짱을 끼게 되는 것도, 그가 나의 가슴을 만지는 것도 다 섹스였고 다 강간이었다. 뭐, 지금 와서 예전엔 내가 이렇게 바보였다라고 고백할 생각은 없다. 단지 난 엘리의 결벽증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엘리의 욕망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그 강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숨막힘 만큼, 그의 손을 원하는 가쁜 숨을 쉬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도박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가 늑대이거나, 아니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가 늑대라는 결론이라면 나는 여기서 게임을 끝내야 한다. 그가 늑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면, 나는 스릴을 맛보며 게임을 즐길 것이다.